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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지표면의 유일한 생산자, 잎

 

봄인가 싶어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사위가 어둡다. 나무 잔가지 사이의 빈틈이 하루가 다르게 채워진다. 그에 따라 화려한 사치재인 꽃은 사위어 가거나 어둠 속에 잠긴다. 한 이십 년도 더 된 어느 봄날, 성산동 굴다리 지나 수색, 화전을 향해 가다 서오릉 표지판을 보고 샛길로 접어들어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서 나는 내 인생의 또 다른 봄을 보았다. 봄은 채워짐이었다. 야트막한 산에는 가을이면 떨어질 운명인 이파리들이 그야말로 만개한 상태였다. 새로 돋은 활엽수 이파리들은 꿈처럼 눈부셨다. 그 뒤로 나의 봄은 늘 저리 어둡고 밝았다.

한 해가 시작되고 100여일 지날 무렵이면 한반도에도 잎 소식이 들려온다. 그 뒤로 200일 남짓 잎들은 대기와 식물이 만나는 접촉면 노릇을 오롯이 해낼 것이다. 바늘잎 식물도 줄기 끝에 연둣빛 새잎을 내밀고 물질과 에너지를 교환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사시나무처럼 펄럭이는 것도 있지만 대개 잎은 태양 빛을 향해 한쪽 면만을 노출한다. 광합성을 하기 위해서다. 광합성이 제 몫을 다할 때까지 잎을 키우는 에너지원은 뿌리와 줄기에서 온다. 그렇기에 이른 봄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고로쇠 수액은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광합성 말고 나뭇잎이 하는 일은 또 없을까? 한 시인은 ‘풀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먼저 일어’난다지만 쓰러질지언정 나무는 결코 눕지 않는다. 대신 나뭇잎은 바람의 운동량을 흡수하고 그 속도를 변화시킨다. 그렇게 공기 흐름을 교란하면서 잎은 뜨겁거나 찬 공기 또는 습하고 마른 공기를 뒤섞는다. 숲을 이루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진다. 비가 오면 잎은 물의 흐름을 늦춘다. 이런 현상은 아파트나 골프장을 짓느라 나무를 베어버린 곳에서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뭇잎은 물방울을 머금고 숲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식물이나 곤충 또는 동물들이 만드는 페로몬과 방향성 화합물을 잠시 보관하기도 한다. 솔숲에서 풍기는, 후각 수용체를 자극하는 상큼한 솔향을 떠올려보라.

하지만 무엇보다 요긴한 일은 잎이 증산 작용의 주역이라는 사실이다. 땅에서 길어 올린 물은 잎 뒷면 기공을 지나 밖으로 나가면서 수증기로 변한다. 물이 수증기로 변할 때 필요한 에너지는 주변에서 얻는다. 어둡도록 침침한 숲에서 한기를 느끼는 까닭은 이런 잠열 덕분이다. 또한 태양에서 도달하는 가시광선을 흡수하거나 반사, 산란하는 일도 나뭇잎의 주된 업무다. 이는 지구적 규모에서 물과 에너지를 순환하는 과정의 중요한 축이다.

이런 모든 일은 나뭇잎의 표면적이 넓을수록 더 증폭되며, 남북 반구 온대지역에서 일 년을 주기로 차질없이 진행된다. 봄이 되면 나뭇잎의 표면적은 얼마나 늘어날까? 1947년 영국 로담스테드 농업 연구소의 왓슨은 잎 면적 지수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지표면의 면적과 비교한 잎의 면적을 비율로 나타낸 것이다. 애초 이 개념은 잎 면적당 작물의 수확량이 얼마나 되는지 예측하기 위한 방도로 생겨났다. 광합성 효율에 잎의 면적과 빛 노출 시간 적분 값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그것의 수확량을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의도야 어떻든 잎의 총면적을 재는 일은 쉽지 않다. 나뭇잎을 전부 따고 그 면적을 계산하는 방법도 없지는 않겠지만 과학자들은 빛의 투과도를 계산하거나 드론 같은 무인비행기를 띄워 사진을 찍어 추적하는 간접적인 방식을 선호한다. 한편 일부 과학자들은 특정 지역에 서식하는 나무의 잎 면적 지수를 종류별로 파악하기도 한다. 중국 하얼빈 대학 연구진은 줄기를 잘라 거기 매달린 잎의 면적을 계산했다. 그들에 따르면 1g당 잣나무 잎의 면적은 79㎠, 단풍나무는 400㎠에 이르렀다. 잎 면적이 적은 잣나무는 겨울날 한 줄금의 빛도 놓치면 안 된다.

하지만 이런 실험의 궁극적 목표는 특정 생태계의 생산성을 평가하는 일이다. 2018년 캐나다 과학자들은 인디애나폴리스주 모르건이 보스턴이나 미시건주 생태계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잎이 나오고 그 지속 시간도 길다고 관측했다. 당연히 광합성 산물의 양도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한번 성숙한 잎은 하지를 지나 낙엽이 질 때까지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래서 잎 면적 지수 곡선은 <어린 왕자>의 ‘코끼리를 삼킨’ 뱀 꼴이다. 곡선의 중간은 평평하며 그 값은 거의 6에 가깝다. 잎의 면적이 그 아래 땅보다 6배 넓다는 뜻이다. 잎은 지표면의 유일한 생산자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인간계 위 지구 계면을 지그시 올려본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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