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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시간의 과학, 시간의 정치

‘타임’이라는 이름의 담배가 있다. 담배가 타들어가면서 시간이 연기와 재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어서인지 인기를 끌었다. 어쩌면 그 담배 이름을 제안한 사람은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읽었을지도 모른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을 회색신사에게 넘겨주고 세속적 성공을 얻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회색신사들이 피우는 담배에 담긴 ‘죽은’ 것이었다.

이처럼 시간의 흐름은 우리에게 종종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아무리 좋은 시간도 결국에는 끝나기 마련이고 나이듦과 죽음은 결국에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기 마련이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되돌리거나 영생을 얻으려는 인류의 시도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절대시간’ 개념을 갖게 되었는지가 신기하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상대성 이론을 쉽게 설명해달라고 조르는 신문기자에게 농담 삼아 말했듯이, 우리가 시간을 느끼는 방식은 누구와 함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정도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지루하게 주사 맞는 순서를 기다릴 때의 시간은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좋아하는 웹툰을 깔깔거리며 볼 때의 시간과 분명 다르게 간다.

결국 객관적으로 흐르는 ‘절대시간’의 개념은 인간의 주관적 의식 경험이 아니라 외부 사물, 즉 특정 현상의 반복되는 패턴에 대한 인식에서 유래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까마득한 옛날부터 인간이 깨달았듯이 봄·여름·가을·겨울이 반복된다거나, 갈릴레오를 비롯해 자연현상을 유심히 관찰하던 사람들이 깨달았듯이 일정한 길이를 가진 진자는 항상 같은 시간 안에 같은 위치로 돌아온다는 사실처럼 말이다.

이런 자연현상의 규칙성은 인간의 삶과 직결되어 있기에 중요했다. 구석기 시대에 그려진 라스코 동굴 벽화에는 사계절의 규칙적인 현상에 따라 인류 집단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묘사한 장면이 많다. 그때부터 일종의 달력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단위를 사용했지만 그들도 별자리나 기온의 변화 등을 통해 시간의 길이를 객관적으로 측정하려 노력했다. 그 이유는 시간 측정이 어떤 시기에 어떤 동물을 어디에서 사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처럼 생존에 결정적인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시간의 흐름을 그림자의 길이로 측정했고, 이 방법이 불가능한 밤에는 양동이에 작은 구멍을 내서 ‘일정하게’ 새어 나오는 물의 양으로 시간을 측정했다.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자연에 존재한다고 가정된 규칙성이 진정으로 규칙적이라는 것, 즉 일정한 시간마다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밤의 길이가 계절에 따라 계속 변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양동이에서 흘러나온 물의 양은 어젯밤과 오늘 밤이 조금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까? 만약 자연의 이치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물의 흐름 자체가 늘었다 줄었다 하도록 되어 있다면 어떨까? 이럴 경우 1년 내내 양동이에서 밤새 흘러나온 물의 양은 정확히 똑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밤새 잠을 자지 않고 관찰하면 양동이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양이 일정한지 여부를 검증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물의 양이 정말 ‘일정한’지를 확실하게 판단하려면 ‘일정한’ 시간 간격마다 물의 양을 재야 한다. 그런데 이 작업은 우리가 이미 정밀한 시간 측정을 할 수 있을 때만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물시계 자체가 시간 측정을 위해 만든 장치가 아닌가?

결국 우리가 시간 측정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서는 이미 시간 측정을 정확히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처럼 시간 측정은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특정 자연현상이 ‘절대시간’에 대해 규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규약’으로 받아들이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절대시간’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개념적으로 시간 측정에는 규약성이 개입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시간 측정이 객관적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시간 측정의 상호주관성을 여러 방식으로 높일 수 있다. 물의 흐름보다는 훨씬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자연현상, 예를 들어 세슘 원자의 에너지 진동을 활용해 시간을 보다 정밀하게 측정할 수도 있고, 플랑크 상수처럼 우리가 믿고 있는 핵심 물리학 이론에 시간 측정을 연동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시간 표준을 어떻게 정할지의 문제는 과학의 영역인 동시에 정치의 영역이다.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시간대를 나눈 결정은 파리 천문대를 기준으로 하려는 프랑스의 집요한 반대를 뚫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지구는 둥글기에 어디에서 해가 뜬다고 ‘절대적으로’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표준은 국가 간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치는 아니다. 최근 영국에서는 그리니치 표준시가 현재 돌로 표시된 위치보다 1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지구의 모양을 정확히 측정해 밝혀내 화제다. 이처럼 시간의 측정에는 과학과 정치가 항상 공존한다.



이상욱 | 한양대 교수·과학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