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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풍경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2015년 드라마 <송곳>에서 본 명대사다. 같은 사람이어도 경제적 상황이나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면 세상을 보는 눈도 변한다는 의미다. 한 사람이 보는 풍경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누적된 삶의 경험이 천양지차인 두 사람이 보는 풍경의 차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도 떠오른다. 참과 거짓을 가르는 기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각자가 제각각 다른 기준을 갖는다는, 진리의 상대성에 대한 주장이다. 프로타고라스가 한 이 말에 등장하는 인간은 단수형이어서, 인간이라는 유(類)를 뜻하지 않는다. 각자가 주장하는 각자의 진리만이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기도 하다. 서있는 곳이 달라 세상도 달리 보는 이들이, 서로 자기가 보는 풍경만이 옳다고 우기는 형국이다. 자기가 가진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옳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틀리다고 많은 이가 믿는다. 다름과 틀림은 엄연히 다른데도, 다르면 틀린 것이라고 우리는 틀리게 생각한다.

 

물리학에도 풍경이 있다. 영어 알파벳 W는 두 골짜기 사이에 산봉우리가 있는 모습이다. 옆에서 보면 W의 꼴이 되도록 철판을 구부리고 가만히 구슬을 그 위에 놓으면, 철판의 경사를 따라 아래로 구르는 구슬은 둘 중 한 골짜기 바닥에 멈춘다. 물리학의 에너지 풍경(energy landscape)이 바로 W의 꼴로 구부린 철판 같은 거다. 물리계는 에너지 풍경의 가장 깊은 골짜기인 바닥상태에 있으려는 경향이 있다. 작은 물방울이 네모나지 않고 둥근 이유, 물이 위가 아니라 아래로 흐르는 이유, 날이 추워지면 물이 수증기가 아니라 얼음이 되는 이유, 눈의 결정이 사각형이 아닌 육각형 모습인 이유, 하나같이 모두 마찬가지다. 그럴 때가 아닐 때보다 에너지가 더 낮아 그렇다.

 

자, W자 모양의 에너지 풍경을 다시 보자. 둘 중 어느 골짜기에 구슬이 결국 안착할지는, 처음 출발한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왼쪽 절반 어느 위치에서 출발한 구슬은 왼쪽 골짜기 안에, 오른쪽 절반 어딘가에서 출발한 구슬은 오른쪽 골짜기 안으로 쏙 들어가고, 한번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구슬은 저 건너 다른 골짜기로 폴짝 저절로 옮겨가지 못한다. 전체 에너지 풍경 W를 보는 우리 눈에는 두 골짜기가 모두 보이지만, 왼쪽 절반 어딘가에서 출발해 왼쪽 깊은 골짜기에 도착해 멈춘 구슬은 오른쪽 골짜기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저 산 너머에는 이곳에서 볼 수 없는 다른 풍경이 있다. 이 골짝 저 골짝 속속들이 모두 들여다보지 않고, 네 골짜기보다 내 골짜기가 더 깊다고 우길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좁은 경험이 만들어낸 내가 보는 풍경은 세상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른 이가 다른 곳에서 보는 풍경도 내 눈에 보이는 풍경과 다르지 않다고 섣불리 믿으며 나의 척도로 세상 모든 것을 재려 한다. 나와 다른 풍경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선 데 내가 서 본 적이 없기 때문일 뿐이다.

 

저 산 너머의 풍경은 산봉우리에 올라서야 보인다. 에너지 풍경의 골짜기에서 출발해 봉우리에 올라서려면 골짜기 바닥에서 봉우리 꼭대기까지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높은 곳에서 짜릿한 낙하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전기로 작동하는 전동기를 이용해 롤러코스터를 높은 봉우리 위에 올린다. 전기의 형태로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으면 롤러코스터는 출발지보다 더 높은 위치로 스스로 올라가지 못한다.

 

우리 사는 세상의 풍경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선 곳이 네가 선 곳과 달라 보는 풍경에 합의할 수 없을 때, 이 골짝 저 골짝 어디가 더 깊은 지 목소리 높여 다툰다고 될 일이 아니다. 에너지가 필요해 많이 힘들어도, 서로 손 맞잡고 봉우리에 함께 힘써 오를 일이다. 제각각 갇힌 골짜기 안에서 서로 이곳이 더 깊다 외쳐봐야 메아리만 들릴 뿐이다. 진리는 저 산 너머에도 있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