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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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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취미, 과학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이 떠오를까. 세련된 몸가짐과 적절한 외국어 실력, 다양한 문화지식, 그리고 국제정치에 대한 해석과 진단, 동서양 고전에 대한 해박한 이해, 클래식 음악의 유명 피아니스트별, 지휘자별 특성과 구별법 등등? 이런 교양인과 시간을 보내면 주워듣고 배울 것이 많아 재미있다. 세상이 교양인으로 가득 차면 평화가 넘쳐날 것 같은데 실상을 별로 그렇지 못하다. 점잖은 교양인들이 음풍을 논하는 음악 사이트, 각종 마니아 사이트, 스포츠 토론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살벌하다. 심한 경우 옆에 곡괭이라도 있으면 들고나와 때릴 기세이다. ‘세계 10대 피아니스트’에 누가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엄청난 독설과 조롱으로 다툰다. 이런 싸움은 마징가와 태권브이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를 ..
과학의 아나키즘 지난주 학교 앞에 다리 하나가 열렸다. 카이스트 정문에서 대전 시내에 곧바로 이어지는 다리로 융합의 다리, 과학의 다리 등 우여곡절 작명 과정 끝에 ‘카이스트교’로 개통됐다. 다리 중간에 과학자 기념 공간이 있는데 한 편에는 세계적인 과학자 넷, 다른 편에는 한국 과학자 셋의 흉상이 놓였다. 일부러 한국 과학자 흉상 자리를 하나 남겨 놓았는데 미래의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를 위해서란다. 포스텍에도 학생들이 많이 드나드는 무은재기념관 앞 광장에 아인슈타인, 에디슨, 뉴턴 등 과학자 흉상 옆에 미래의 한국 과학자를 위한 좌대가 놓여 있다. 이처럼 세계적인 과학자 반열에 드는 한국인 과학자 탄생에 대한 염원은, 입시교육 체제에서 무지막지하게 재미없이 가르치는 중·고등학교 수학·과학 수업, 실험실 연구보다 연구과..
엔트로피와 햄버거 엔트로피라는 물리학 용어가 있다. 다른 전문 용어와 달리 엔트로피는 여기저기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개념이기에 비교적 익숙하다. 엔트로피는 흔히 무질서의 정도를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질서가 없고 혼란스러울수록 엔트로피가 높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릇에 콩과 팥을 잘 섞어 놓은 상태가 콩과 팥을 깔끔하게 분리해 놓은 상태보다 엔트로피가 높다. 하지만 엔트로피를 무질서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대강만 맞다. 그 이유는 물리학의 ‘질서’ 개념이 일상적 질서 개념과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와 관련된 무질서의 정도는 특정 ‘거시상태에 대응되는 미시상태의 개수’로 정의된다. 이때 거시상태란 큰 틀에서 볼 때 같은 결과로 파악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이에 대응되는 미시상태의 개수란 그 거시상태를 구체적..
성찰이 필요한 ‘생명공학의 질주’ “무엇을 상상해도 현실에서 이룰 수 있다. 아니 그 이상이다.” 10년 전부터 세계 생명공학계에서 줄곧 들려온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생명공학 기법이 개발되고, 이를 적용한 실험결과가 쏟아져 나온다. 생명체의 유전자를 변형하는 작업이 그 중심에 있다. 변형의 대상에 농산물과 가축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작은 2000년대 중반 미국에서 출범한 합성생물학 분야였다. 말 그대로 생명체를 합성하겠다는, 일반인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목표를 내세운 공학자들이 등장했다. 생명체의 기본 특성만을 갖추고 작동하는 무언가를 합성하려고 했다. 먹고 살 수 있는 대사 능력, 자손을 낳는 생식 능력, 그리고 변화되는 환경에 버티는 적응 능력 등을 갖춘 생명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략 살아 움직이기만 한다면 ..
몇 명이 모였나 세어보자 한 주제로 모인 군중의 수는 사안의 시급성이나 지지 세력의 위력을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렇기 때문에 각 진영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군중 수는 다르게 보이게 된다. 조금이라도 더 많았으면 하는 쪽과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쪽에서 내놓는 집계는 이 때문에 항상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일정 공간에 머물고 있는 사람의 수를 정확하게 계산해야 하는 이유에는 정치적 진영논리가 아닌 현실적인 요구도 있다. 저개발 국가의 낙후된 지역에 치명적인 전염병이 번지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출생·사망 신고조차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 정확히 알아내는 일은 사용할 백신의 양과 의료진 수, 나중에 주민을 따로 옮겨 거주하게 할 임시 숙소의 개수를 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초 작업이다. 가장 ..
시인을 위한 물리학 캠벨 수프 캔을 나란히 늘어놓은 그림으로 유명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스스로를 ‘심오하게 피상적인’(deeply superficial)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그가 죽기 일년 전 제작한 자화상에 딸려 있는 표현이다. 이 자화상은 워홀 사진 네 장을 실크스크린으로 겹쳐 인쇄해 평면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3D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해석에 따라 ‘deeply’는 그냥 ‘매우’처럼 다음에 오는 형용사를 단순히 강조하는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깊이와 표면을 각각 다른 품사로 표현하여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나는 이 표현이 이공계중심대학에서 인문사회 교양교육이 갖는 딜레마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올해 시작된 ‘제3차 과학기술인재 육성·지원 기본계획(2016~2020)’은 세부 추진과제 중 하나로..
빅데이터, 만능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선거 승리는 많은 사람에게 충격으로 여겨졌다. 각종 예측 결과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했던 힐러리 클린턴이 그토록 많은 표 차이로 패배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대통령 선거 제도의 기묘한 특징 때문에 클린턴이 실제 득표수에서는 앞서고도 선거인단 수에서 뒤진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근소한 차이도 아니고 완패를 당했다는 사실은 이변이었다. 당연히 선거 이후 왜 선거 예측이 틀렸는지를 놓고 여러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통상적인 확률 해석에 따르자면 클린턴이 높은 확률로 트럼프를 이길 것이라는 예측과 트럼프가 클린턴을 이긴 실제 선거 결과는 모순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동전을 던져 앞면이 연속해..
컴퓨터 버리는 방법 한 해 동안 버려지는 PC, 노트북이 100만대가 넘는다. 그런데 컴퓨터는 냉장고와 달라서 반드시 이전 흔적을 지우고 그것을 확인한 뒤에 버려야 한다. 외국 경우지만 중고시장에서 구한 PC의 하드에서 수만건의 환자 정보가 복원된 사례에서 보듯 무심코 버린 컴퓨터는 해커의 좋은 먹잇감이다. 컴퓨터에서 파일을 없애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버린 파일을 담아둔 휴지통을 비우는 작업도 파일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파일 메타정보에 ‘삭제됨’이라는 표시(tagging)를 하는 것이다. 메타정보 태그는 강시 이마에 붙이는 부적과 같다. 부적만 떼면 강시는 언제든지 다시 살아난다. 도서관 목록에서 특정 도서카드를 빼버리면 사람들이 그 책을 찾을 수 없는 원리와 같다. 그러나 그 책 자체는 도서관에 남아있어 ..
새로움은 가치가 아니다 첫애가 첫애일 수 있는 것은 둘째, 셋째처럼 다른 애들이 있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첫애는 외둥이가 되어버린다. 처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다음이 있어야 하는 게 사는 이치임에도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평가에서는 종종 이를 망각하는 제도가 설계되고 존속된다. 대표적인 것이 유사·중복연구 방지제도이다. 정부는 국가연구개발과제 수행 시 ‘국가연구개발사업관리 등에 관한 규정’ 제7조에 따라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시스템(NTIS)을 통한 과제 유사성 검토를 의무화하고 있다. NTIS 구축사업 경제성 분석에 관한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유사·중복 과제 방지를 통해 2005~2012년까지 총 630억원을 투입해 약 5409억원 이상의 예산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2013년 감사원에서 2008년부터 5년간..
위대한 과학 연구의 뿌리 올해도 어김없이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한국인 수상자는 올해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매년 반복되던 언론과 정부의 요란한 ‘뒷북치기’가 없었다는 점이다. 노벨상 발표 직후 언론은 ‘우리는 이래서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는 탄식을 쏟아내고 정부는 ‘이렇게 해서 곧 노벨상을 받겠다’는 기발한 전략을 제시하곤 했는데, 올해는 워낙 국가를 뒤흔든 대형 사건이 많아서인지 노벨상 정도는 호들갑 떨 사안이 아닌 것 같다. 사실 그래야 마땅하다. 노벨상은 해당 학문 분야에 지대한 기여를 한 학자에게 주는 것이지 그 학자의 ‘조국’에 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노벨상 위원회는 국가별 노벨상 수상자 숫자를 따로 집계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노벨상이 국민 대다수의 삶의 질 향상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 느슨한 GMO 검사기준 독성시험. 일반인에게 다소 섬뜩하게 들리겠지만 새로운 종류의 식품을 개발하고 심사할 때 당연히 거치는 과정이다. 미생물의 유전자가 삽입된 콩이나 옥수수 같은 유전자변형농산물(GMO)을 사람이 먹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심사할 때도 마찬가지다. 외래 유전자가 농산물의 유전자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지, 혹시 농산물의 기존 유전자에 변형이 생겨 새로운 종류의 독성물질이 만들어지지 않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주요 수단이다. 독성시험은 주로 쥐와 같은 실험동물에게 GMO를 일정 기간 투여하고 그 결과를 검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한국인이 섭취하는 GMO는 모두 정부의 안전성 심사를 통과했다. GMO 개발사는 독성시험 결과를 제시해야 하고, 심사위원들은 이를 포함한 다양한 자료를 검토해 수입 승인 여..
우린 모두 우사인 볼트 대전역에 지금은 사라졌지만 두 평 남짓한 서점이 있었다. 언젠가 출장길에 그 서점에서 이봉주 선수의 자서전을 잠깐 읽었다. 서문에 이봉주 선수가 달리기에 대해 내가 평소 느끼던 상태를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무척 놀랐다. 나는 달리기를 나름 오래 한 축인데도 달리기를 하려 할 때마다 큰마음을 먹어야 한다. 별의별 핑계가 생기는 것이다. 일이 몰릴 때는 이렇게 바쁜데 오늘은 무리네, 아침 일찍 뛰겠다고 눈을 뜨면 왠지 몸이 뻐근하군, 오늘은 쉬어야겠네. 그런데 막상 나가 뛰기 시작하면 핑계를 언제 댔느냐는 듯이 상쾌하게 달리게 된다. 그런데 이봉주 선수도 아침에 눈을 뜨면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린다는 것이다. 비가 오네, 어제 너무 달렸네 하면서 오늘은 건너뛰고 싶은 이유를 찾다가 에이..
과학소설에는 ‘공상’이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문학적 맥락에서 허구란 “실제로는 없는 사건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해 냄. 또는 그런 이야기”를 의미한다. 한편 공상이란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봄. 또는 그런 생각”을 의미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과학소설(SF)에는 허구는 있지만 공상은 없다. 대신 과학소설에는 실제 과학 이론에 근거한, 삶의 다양한 모습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있다. 그럼에도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공상과학소설’도 등재되어 있는데, 그 정의는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를 벗어난 일을 과학적으로 가상하여 그린 소설”이다.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모든 허구는 현실적 시공간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볼 수 있기에 결국 공상과학소설에서도..
후성유전학의 메시지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과학이론은 평생 머릿속에 각인돼 있기 쉽다. 한때 거짓이라고 판명된 과학자의 주장이 어쩌면 옳았을지 모른다고 의문을 품는 사람은 일부 관련 연구자에 한정된다. 하지만 그 내용이 사람의 건강과 밀접히 연관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반인의 상식으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는 방사선 노출 같은 특별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 한 평생 변하지 않는다. 교과서에도 다윈과 동시대에 활동한 라마르크가 설파한 ‘획득형질의 유전’ 현상은 없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최근 생물학계에서 색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다. 유전자변형생물체(GMO)나 유전자 검사 등 일반인의 일상을 파고드는 생명공학의 산물에 대해서도 새롭게 의미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과학사학자 로렌 그래암 ..
메타이론으로 본 ‘공수처’ 세상에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만일 재미있는 정도를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하고 어떤 집단에서, 예를 들어 회사에서 가장 재미없는 사람을 골라냈다고 해보자. 그런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준다면 가장 재미없다고 찍힌 당사자는 우리에게 큰 재미를 안겨주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 것이다. 일차원적 ‘재미없음’을 넘어서는 고차원의 재미를 선사하는 셈이다. 이런 것은 평범한 재미의 단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재미, 즉 메타(meta)적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웃기는 것 빼고 모두 가능하다는 역설적 캐릭터로 인기를 끈 한 개그맨의 메타 전략이 생각난다. 사물과 개념을 다양한 차원으로 접근하는 메타적 분석력은 현실에서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메타적 접근은 어느 분야나 존재한다. 개별 행..
한여름밤의 테슬라 명연설로 회자되는 스티브 잡스의 2005년 스탠퍼드 졸업식 축사는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말로 끝난다. 이 구절은 70년대 중반 잡스가 애독하던 ‘지구백과’라는 잡지가 폐간될 때 편집자가 마지막 호 뒤표지에 실은 고별의 글이다. 억만장자인데다가 한참이나 똑똑했던 이가 남들보다 잘나가는 미래가 예측되는 수재들 앞에서 정반대의 조언을 던진 것은 의외였다. 나는 오래도록 왜 잡스가 수십년 전에 접한 이 구절을 기억하고 자서전적으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았던 연설을 이 구절로 마쳤을까 궁금했었다. 전기요금 폭탄이 날아올까 조마조마하던 여름에 현대 전기시스템의 근간인 교류전기를 개발한 니콜라 테슬라의 전기를 읽으면서 이 궁금증에 대해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2015년 버지니..
갈릴레오와 ‘공감하는 바늘’ 17세기 중엽 유럽에서는 ‘공감하는 바늘’이 대유행이었다. 두 바늘을 같은 자철광으로 동시에 자석으로 만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서로 다른 바늘에 ‘공감해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그 배경에 있었다. 똑똑한 사람들은 한 바늘 주위에 알파벳으로 원을 만들고 각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메시지를 만들어 보내면 다른 바늘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이 메시지를 그대로 복제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정보전달 장치의 가능성이 열리는 셈이었다. 당시 시대조류에 밝았던 영국의 문필가 토머스 브라운은 이 바늘 이야기가 사기임에는 분명해 보이지만 평소에는 잘 속지 않는 학자조차 이런 멋진 가능성을 쉽게 부정하지는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런 주장을 왜 당시 자연..
무선중계기, 사드, 진짜 과학 아파트 동대표 때의 일이다. 전체 입주자 대표회의에 옥상에 설치된 통신사 무선중계기의 철거가 의제로 올라왔다. 일단 사안을 좀 더 알아본 뒤 다음 전체 회의 때 결정하자고 정리됐다. 당시 아파트에 무선중계기 설치를 허락하면 200여만원을 아파트 잡수입으로 받을 수 있었다. 해당 통신사에서는 중계기의 전자기파가 허용기준치 이하이므로 안심해도 된다고 열심히 홍보했다. 몇 주 지나 입주자 대표 전체 회의가 다시 열렸다. 다수 참석자들은 전자기파의 유무해를 떠나 이런 식의 일방적 설치 후 승인 요청에 불만을 보였다. 한편 철거에 반대 입장을 밝힌 동대표도 있었다. 요즘같이 모두가 휴대폰을 쓰는 세상에 주민 전체를 위해 무선중계기가 아파트 단지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철거를 요구한 동대표가 응답했다. ..
1776년 냉전 시기에 초·중·고 시절을 보냈고 냉전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이념 갈등이 심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심한 분란의 씨앗은 정치적 이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나 계급만큼 사람들을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이 종교, 인종, 문화의 차이라는 것은 유학을 가서야 깨달았다. 조그만 외교전문잡지 기고문에서 시작한 하버드대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이 책으로 출간된 해가 1996년이다. 그해 유학길에 올랐는데 이 신작을 접하고는 다소 의외였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헌팅턴 같은 학자가 문명 같은 개념을 말하는 게 우산 장수가 비가 그치니 짚신을 파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헌팅턴은 냉전 시기 이념 투쟁의 전장이었던 제3세계의 정치불안정을 정치질서의 부재로 보고 그 원인을 급속한 사회변화와 상대적으로 ..
가상·증강현실의 핵심은 상상력 영국 런던 북쪽에 자리 잡은 레전트 파크는 형형색색의 화초가 마치 잉글랜드의 초원을 옮겨 놓은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정원을 걷다보면 기하학적 조경이 두드러진 프랑스식 정원과 달리, 제멋대로 심어놓은 식물들의 ‘자연스러움’이 돋보인다. 하지만 이는 치밀하게 계산된 ‘환상’이다. 실은 영국 정원만큼 정원사의 인위적 노력이 돋보이는 환경도 드물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초목의 느낌을 구현하기 위해 정원사들은 대영제국 시절부터 수집해 온 세계 곳곳의 ‘이국적’ 식물들을 영국의 풍토에 맞게 개량한 후 적당히 섞어 배치했다. 레전트 파크를 거닐며 번잡한 도시의 인공적 삶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방문객들은 실은 자연과 인공의 절묘한 결합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최근 ..
노벨상 수상자들의 의아한 발표 이달 초 노벨상 수상자 110명이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를 상대로 작성한 편지 한 통이 화제를 모았다. 크게 두 가지 사실이 눈길을 끌었다. 무려 110명이나 되는 세계 최고의 지성들이 뜻을 모은 일 자체가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편지에 서명한 인물들은 대부분 물리, 화학, 생리의학 등 과학 분야의 수상자들이었다. 생명의 설계도라 불리는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공로로 1962년 노벨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88)은 최고령자로 이름을 올렸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의 주장이 과학기술의 영역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유전자변형농작물(GMO), 특히 황금쌀의 보급에 대해 그동안 그린피스가 펼쳐온 반대활동을 중지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황금쌀이 상용화되지 못한 이유가 마치 그린피스의 반대 때문인 것으로 오..
위조의 기술, 감정의 과학 미켈란젤로도 위작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르네상스시대 생존 작가들의 작품은 싼값으로 거래가 됐기 때문에 생계형 위작이 만연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돈벌이 목적과 더불어 당시 주류 미술계를 놀려먹기 위한 목적으로 위작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조각품을 땅에 묻어서 시간의 흔적을 덧씌운 다음, 우연한 기회에 발굴한 것같이 꾸며 로마시대의 걸작으로 팔아먹었다. 저자 노아 차니도 이와 같은 맥락의 주장을 한다. 위조범의 목적은 돈벌이에도 있지만 자신의 재능을 무시한 주류 예술계에 대한 보복적 성격도 있다고 한다. 위작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를 속이는 작품을 만드는 것도 엄청난 재능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림을 바로크 황금시대의 화가 페르메이르의 진품이라고 속여 나치..
달과 말라리아 우연히 관여하게 된 개발도상국(개도국) 과학기술협력사업으로 아프리카 케냐와 나이지리아에 다녀왔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는 서늘한 고원이라 모기가 덜하지만, 나이지리아 수도 아부자는 덥고 습한 기후로 모기에게 안 물리면 이상한 곳이었다. 아프리카에 가려면 소위 예방접종 4종 세트를 준비해야 하는데 황열병, 장티푸스, 파상풍, A형 간염 주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프리카 대륙 하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말라리아는 접종 리스트에 없다. 왜냐하면 말라리아는 바이러스가 아닌 기생충이기 때문이다. 예방 주사가 아니고 예방약을 먹는데 이게 부작용이 심해 개도국 사업을 오래 한 분들은 차라리 그냥 가서 말라리아에 걸리면 현지 약을 구해먹는 것이 더 낫다고 한다. 말라리아는 풍토병이기 때문에 그런 병이 없는 선진국보다는..
브렉시트가 폴란드 빵집 때문? 과학이 보여주는 세상의 모습은 종종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상식적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묘하더라도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라면 유용할 때가 많다. 최근 인간의 판단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 주도하며 우리는 일단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선택을 하고 나면 온갖 종류의 자기합리화를 통해 이 선택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만 이성을 활용한다는 주장이 주목을 받고 있다. 손쉽게 도덕적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있는 이 주장은 국내에서도 한때 정치인들이 대중의 마음을 끌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호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지난주 브렉시트 상황은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영국민들에게 유럽연합에 잔류할 것인지를 묻는 국민투표 직전까지 가장 주목받았던 쟁점은 단연코 급증하는 이민..
슈퍼연어와 소비자의 견제 캐나다 정부가 자연산보다 두 배 빨리 자라는 ‘슈퍼연어’를 식품으로 사용해도 된다고 결정했다. 미국에서는 칼로 잘랐을 때 갈색으로 변하지 않는 사과를 곧 시중에 선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유전자변형생명체(GMO)가 점점 다양한 형태의 음식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러다 GMO가 아닌 재료로 만든 음식이 없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첨단기술로 만든 상품이라 해도 시장에서 성공하리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소비자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설 때 상품은 설 자리 자체를 잃을 수 있다. 슈퍼연어는 1989년 미국과 캐나다의 합작 벤처회사인 아쿠아바운티가 개발했다. 보통의 연어는 3년 정도 자란 후 시장에서 판매된다. 이에 비해 슈퍼연어는 1년6개월이면 비슷한 크기로 성장한다고 한다. 소비자가 이렇게 빨리..
마시멜로와 폴라로이드 2005년 출간 직후 번역된 베스트셀러 로 유명해진 마시멜로 테스트는 1960년대 스탠퍼드대 월터 미셸 박사가 고안한 실험으로 유치원생들에게 마시멜로를 보여준 후 15분 참았다 먹으면 하나 더 주기로 하고 실험에 참여한 아이들을 15년간 추적했다. 그 결과 기다렸다가 먹은 아이들이 시험성적이나 건강지수, 행복도 등이 전반적으로 더 높았다. 한동안 대학입시라는 장기전을 치러야 하는 부모들이 집에서 마시멜로 테스트를 하고는 희비가 갈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마시멜로 실험의 요지는 즉각적인 만족보다 장기적인 보상을 추구하는 자제력이 성공의 주요 요인이라는 것이다. 보상이란 일종의 유인(incentive)으로서 어떤 행동이나 선택을 할 때 따르는 긍정적인 대가이다. 조직의 관점에서 보자면 마시멜로 실험의 메시..
같은 이야기, 달리 듣지 않기 위해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는 잘 따져보지 않고 반응하는 일의 어리석음을 잘 보여준다. 어차피 얻을 수 있는 도토리의 수는 똑같은 데도 아침에 더 주겠다고 하니 만족스러워하는 원숭이의 한심함을 비웃기는 쉽다. 하지만 우리도 이런 원숭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기란 쉽지 않다. 인지심리학 실험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은 똑같은 내용이라도 표현 방식을 다르게 하면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같은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제시해서 사람들이 다른 측면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평가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공공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평가처럼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맥락에서도 이 효과가 나타난다는 게 심각한 문제다. 예를 들어, 똑같은 정책이 그 정책을 통해 줄일 수 있는 사망자에 주..
국산 GMO 승인 과정 ‘깜깜’ 국산 유전자변형농산물(GMO)의 상업적 개발 속도가 늦춰지고 있다. 지난해 9월 농촌진흥청 GM작물개발사업단은 국내 기술로 개발된 유전자변형 벼와 고추에 대한 승인을 신청하겠다고 예고했다. 승인심사가 계획대로 이뤄졌다면 올해 7월 국산 GMO가 등장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농진청은 승인신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이 섭취하는 주요 농산물이 GMO로 바뀌는 일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는 여론의 동향을 의식했기 때문인 듯하다. 정부가 국민의 먹거리를 새롭게 개발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단 승인이 이뤄지면 국산 GMO가 국내에서 재배돼 시장에 유통되는 상황이 법적으로 보장된다. 그렇다면 국민은 어떤 국산 GMO가 승인대기 상태인지, 조만간 얼마나 많..
하이젠버그, 노약자석, 집토끼 산토끼 프로그램 오류를 찾아 고치는 디버깅 작업은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그 문제가 정말 ‘확실’한 것인지 반복해 확인해야 한다. 오류가 나면 보통 디버거(debugger)라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메모리에 저장된 값을 추적해야 한다. 디버거는 내시경, 실시간 CT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간혹 황당한 일을 당하게 되는데, 이전의 오류가 추가 장치를 이용해서 확인하려고만 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불확정성의 원리 제안자인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이름을 비틀어 하이젠버그(Heisenbug)라고 부른다. 즉 측정하려는 그 행위 자체가 시스템을 변화시켜 오류 측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특히 여러 계산 장치를 연결한 병렬 ..
고통의 전문가 몇 년 전 운동하다 손가락을 다쳤다. 러닝머신에서 신나게 팔을 흔들며 뛰다가 손잡이에 왼손을 부닥쳤다. 약지랑 새끼손가락이 부드득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마치 손가락 관절을 꺾으면 뚝 하고 나는 소리랑 비슷해서 사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가니 그제야 손가락이 붓기 시작하고 아프기 시작했다. 꽤 아팠지만 손가락뼈가 부러졌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뼈가 부러지면 정신을 잃고 쓰러질 정도로 아프지 않겠나. 마침 바쁜 일이 몰려 있어서 집에서 붕대로 고정하고 다니다가 열흘 만에 정형외과에 갔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눈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손가락뼈가 두 동강 나 있었다. 석고 깁스를 하고 3주를 보냈는데 이 작은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막연히 상상하던 고통과 실제 느끼는 고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