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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출 수 없는 바이오파운드리 반도체산업은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 중 하나이다. 반도체가 시장에 나오기까지는 크게 설계, 생산, 패키징 및 조립, 품질검사 그리고 판매 및 유통의 과정이 있다. 실제 웨이퍼를 생산 가공하는 설비들을 갖춘 팹(fab)은 제조설비의 약자로서 이를 갖추는 데만도 수조원의 많은 돈이 든다. 이러한 팹을 갖추고 반도체 설계는 직접 하지 않으며 다른 기업이 설계한 반도체의 생산만을 전담하는 기업을 파운드리라고 부르며, 반대로 설계만을 하는 기업을 팹리스라고 한다. 반도체산업에서의 파운드리와 유사한 개념으로 바이오 분야에는 바이오파운드리가 있다. 바이오제품에는 치료제, 백신, 친환경 석유화학 대체 화학물질, 다양한 기능의 천연물질, 바이오플라스틱 등 많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바이오파운드리는 이런 제품들을 직..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비둘기 새끼를 본 적이 있는가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비둘기 새끼를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병아리 새끼나 개를 어미 삼아 쫓아다니는 오리 새끼를 본 기억이 있다 해도 말이다. 왜 비둘기 새끼는 보기 어려울까? 아마 그 이유는 둥지를 잘 숨기는 데다 새끼가 자랄 때까지 한곳에 머무르는 비둘기의 습성 때문일 것이다. 닭처럼 가축화되진 않았지만 비둘기는 인간 집단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생명체다. 본디 절벽이나 암벽에 구멍을 내고 둥지를 트는 습성이 있던 비둘기는 개구쟁이들의 눈길을 피해 아파트나 빌딩 구석에 은밀하고 안온한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비둘기는 새끼에게 액상 치즈처럼 노랗고 점도가 높은 젖을 먹인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암수 비둘기 모두 젖을 공급할 수 있는 까닭에 새..
[이상엽의 공학이야기] 융합전략, 생명공학 강국의 발판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생명공학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뜨겁다. 오래전 유럽에서는 생명공학을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색깔로 구분하였다. 의학·생명에 관련된 생명공학은 우리의 피 색을 나타내는 레드(red) 바이오텍, 농업·식품과 관련된 생명공학은 나뭇잎 색인 그린(green) 바이오텍, 산업 화학물질 및 소재 생산과 환경에 관련된 생명공학은 화이트(white) 바이오텍으로 부른다. 바이오 시장 규모는 어디까지 포함하는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전 세계 레드, 그린, 화이트 바이오텍 시장 규모는 약 1800조원으로 추정되고 급속히 성장 중이다. 우리나라의 바이오 시장 규모는 34조원 정도로 전 세계 시장의 2%가 안 되는 상황이다.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사람의 ..
[사설]한 걸음 더 나아간 우주과학기술, 한국형 시험발사체 성공 한국형 우주발사체인 ‘누리호’의 시험발사체 발사가 성공했다. 한국항공우주원은 28일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발사한 “시험발사체 엔진이 당초 목표했던 140초 이상 연소했다”고 발표했다. 시험발사체의 발사 성공은 엔진의 연소시간으로 평가하는데, 이번 발사체는 목표 연소시간을 넘어 정상 추진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이번 시험발사체에 장착된 75t급 엔진은 한국 기술로 개발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발사체 엔진 기술 보유국’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번 발사 성공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의 우주개발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다. 1996년 우주발사체를 자체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이후 20여년 만에 얻은 결실이다. 발사체의 엔진 관련 기술은 어느 나라든 해외 이전을 꺼리는 핵심 분야다. 이에 한국 연구..
[기고]톈궁 1호 추락이 주는 시사점 지난 주말 중국 최초의 실험용 우주정거장 톈궁 1호의 추락은 세계 각국의 이목을 끌었다. 통제 불능 상태가 된 톈궁 1호가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 예측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톈궁 1호 잔해는 우리 시간으로 4월2일 오전 9시16분경 남태평양 해상에 아무 피해 없이 흩어져 떨어졌다. 톈궁 1호는 지난 2년 동안 지구 저궤도에서 마하 20이 넘는 속도로 선회하며 지구 중력에 이끌려 고도를 서서히 낮추었다. 고도 80~100㎞의 대기권에 진입하면서 톈궁 1호는 엄청난 대기 마찰열과 충격으로 인해 불에 타 분해되며 흩어졌다. 불에 타지 않은 일부 잔해물은 그대로 바다로 추락했다. 대기권 진입부터 해상으로 낙하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잔해물의 무게에 따라 몇 분에서 몇십 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1..
[기고]우주개발, 일관되게 추진해야 지난 6일 미국의 민간 우주기업 스페이스X가 화성으로 쏘아올린 ‘팰컨 헤비’가 화제다. 1973년 달로 향한 새턴V 이후 가장 대규모 로켓이다. 민간 기업이 개발한 초대형 발사체가 전기차를 싣고 우주로 날아오르는 모습에 많은 외신들은 ‘대담한 도전’이라며 찬사를 보냈는데, 우리나라 정부가 ‘제3차 우주개발 진흥 기본계획’을 발표한 직후여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은 정부의 강력한 비전 제시와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1950년대부터 우주개발에 꾸준히 투자해 왔다. 아폴로 프로젝트로 불리는 달 탐사를 위해 수학, 과학 교육시스템까지 전면적으로 개편해 우주개발에 매달렸고,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은 우주 분야뿐만 아니라 미국의 기술과 산업 전반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다. 이후 50년 이상을 긴 호흡으로 ..
랜섬웨어와 4차 산업혁명 한순간 디지털 인류는 멈춰서야 했다. 한 어머니는 컴퓨터에 저장해둔 여덟 살 딸과의 추억이 담긴 모든 사진을 강탈당했다. 어떤 회사 직원은 랜섬웨어로 사업상 필요한 파일을 잃어버려 해고당할까봐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악랄한 범죄자들에게는 인정사정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수익성만 좋다면 그들은 변종을 거듭하는 진화된 랜섬웨어를 만들 것이다. 며칠 전 사상 최대의 랜섬웨어가 사람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 150개국에서 20여만개의 프로토콜(IP)을 공격했다. 피해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랜섬웨어는 개인보다 기업이나 병원 등을 표적으로 한다. 기업들은 데이터 몸값을 지불할 돈이 있기 때문이다. 랜섬웨어는 영국의 40여개 병원과 프랑스의 르노자동차, 미국 페덱스 등을 공격했다. 사상 최대 랜섬웨어 유포를 지켜보면..
모든 세포는 세포로부터 얼추 10만개에 달하는 우리 머리카락의 평균수명은 대략 5년이다. 이 머리카락 한 가닥을 기다란 원통이라고 해보자. 몇 올의 머리털을 세로로 나란히 세우면 폭이 1㎜가 될 수 있을까? 이는 머리카락의 직경이 얼마쯤 되겠느냐는 질문과 같다. 한국인 머리칼의 평균 직경은 80마이크로미터(㎛)다. 그러므로 약 13개의 머리카락을 일렬로 세우면 1㎜가 된다. 우리는 머리카락을 눈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세포는 어떤가? 주먹 쥔 손등을 뚫어지게 본다한들 피부세포가 보일 리 만무하다. 인간의 눈은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를 보지 못한다. 인간이 가진 세포의 평균 직경이 머리카락보다 훨씬 작기 때문이다. 얼마나 작을까? 인간의 세포 약 다섯 개를 나란히 세워야만 머리카락 하나 정도의 폭이 된다. 세포(cell..
잎 없이 꽃을 피운다는 건 가을 잎이 봄꽃보다 붉다는 한시 구절을 들어가며 사람들은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찬탄한다. 여기서 봄꽃은 붉은 매화쯤 될 것이다. 봄의 꽃, 가을의 단풍 둘 다 ‘붉지만’ 쓰임새는 분명 다르다. 매화꽃은 벌을 불러들이지만 가을 단풍은 하릴없이 떨어질 뿐이다. 하지를 지나 낮의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하면 활엽수 잎은 푸름을 버릴 채비를 한다. 붉은 잎은 더 이상 광합성을 하지 않겠다는 식물의 결연한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런 식물의 계절성을 열역학적으로 표현하면 ‘봄은 가을이 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정도가 될 것이다. 가을 햇빛은 화학에너지 형태(탄수화물)로 저장되지 않고 다만 잠시 단풍잎을 따뜻하게 덥힐 뿐이다. 가을은 저절로 봄이 될 수 없다. 잘린 도마뱀 꼬리가 다시 도마뱀이 ..
스티브 잡스와 이재용 삼성전자(이하 삼성)는 스마트폰 경쟁에서 계속 선두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일찌감치 4차 혁명에 나선 구글 등 유수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는 걸까. 소니나 노키아, IBM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되면서 삼성의 위기를 점치는 이들도 있지만 갤럭시8 판매가 시작되는 4월 이후가 가늠자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은 갤럭시8에 4차 혁명의 화두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인공지능 비서 기능을 탑재했다. 인수한 ‘빅스비’라는 인공지능회사의 기술력 등이 선보이게 되면 그 경쟁력에 대한 성적표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디지털 변혁에 적응하기 위해 구글을 비롯해 유수의 기업들이 IT 생태계를 통째로 갈아치우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생태계가 경쟁이 ..
‘귀지’의 생물학 20세기 초반 비타민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던 영국의 프레더릭 홉킨스는 식물을 연구하는 동료 과학자들을 탐탁잖게 생각했다. 배설기관이 따로 없는 식물을 ‘더럽다’고 여긴 까닭이다. 장차 아파트가 들어설, 한바탕 땅을 뒤집어 놓은 척박한 곳에 자리 잡은 버드나무를 의 저자 페터 볼레벤은 개척자 식물이라고 칭했다. 몸피가 허연 자작나무도 또한 개척자 식물이다. 개척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버드나무와 자작나무는 강한 햇살과 목마름을 기꺼이 버티고 견딘다. 그리고 수시로 나무껍질을 떨구어 손상된 세포나 조직을 버린다. 나무껍질은 배설기관이다. 수정을 끝내고 하릴없이 떨어지는 꽃잎도 가을 저물어 떨구는 이파리도 마찬가지로 배설기관이다. 질소와 같은 필수적인 영양소를 몸통에 남긴 채 나무껍질도, 낙엽도 하릴없이 땅으로 ..
인공지능 통제불능 시대 오나 며칠 전 밤새 내린 눈 때문에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다. 일찍 나와서인지 지하철 안은 생각보다는 덜 붐볐다. 승객 대부분은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그들은 예외 없이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야릇한 침묵 속에 스마트폰에 무표정하게 고정된 시선, 그곳에 인간의 생명 같은 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생동감과 착각한 건 아니다. 그들은 마치 목적 없이 내달리는 유령열차에 몸을 맡긴 인공지능 로봇처럼 무미건조했다.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의 말이 떠올랐다. “인류의 현존하는 가장 큰 위협은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은 핵무기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인간이 디지털 초지능을 위한 생물학적 장치로 전락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비슷한 말을 했다. “완전..
생물학 제1법칙은 ‘고귀함’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생물학 제1법칙으로부터 얘기의 실마리를 풀어보자. 너무 당연하다고 여긴 탓인지 교과서에서조차 법칙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지만 나는 ‘어미아비 없는 자식은 없다’는 명제가 생물학의 으뜸 법칙이라고 본다. 이 법칙의 면면을 살펴보기 위해 족보를 예로 들어보자. 가령 경주 김씨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을 시조로 한다. 족보는 시조로부터 시작해서 아래쪽 방향으로 내려오는 계보를 그린다. 보학이 흔히 차용하는 방식이다.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특정 계보의 생물학적 반감기는 7세대 정도라고 한다. 풀어 말하면 7세대가 지나서도 나의 후손이 생존할 가능성은 50%라는 말이다. 보학을 송두리째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이런 얘기를 접하면 시조 한 구절이 ..
교양, 취미, 과학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이 떠오를까. 세련된 몸가짐과 적절한 외국어 실력, 다양한 문화지식, 그리고 국제정치에 대한 해석과 진단, 동서양 고전에 대한 해박한 이해, 클래식 음악의 유명 피아니스트별, 지휘자별 특성과 구별법 등등? 이런 교양인과 시간을 보내면 주워듣고 배울 것이 많아 재미있다. 세상이 교양인으로 가득 차면 평화가 넘쳐날 것 같은데 실상을 별로 그렇지 못하다. 점잖은 교양인들이 음풍을 논하는 음악 사이트, 각종 마니아 사이트, 스포츠 토론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살벌하다. 심한 경우 옆에 곡괭이라도 있으면 들고나와 때릴 기세이다. ‘세계 10대 피아니스트’에 누가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엄청난 독설과 조롱으로 다툰다. 이런 싸움은 마징가와 태권브이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를 ..
과학의 아나키즘 지난주 학교 앞에 다리 하나가 열렸다. 카이스트 정문에서 대전 시내에 곧바로 이어지는 다리로 융합의 다리, 과학의 다리 등 우여곡절 작명 과정 끝에 ‘카이스트교’로 개통됐다. 다리 중간에 과학자 기념 공간이 있는데 한 편에는 세계적인 과학자 넷, 다른 편에는 한국 과학자 셋의 흉상이 놓였다. 일부러 한국 과학자 흉상 자리를 하나 남겨 놓았는데 미래의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를 위해서란다. 포스텍에도 학생들이 많이 드나드는 무은재기념관 앞 광장에 아인슈타인, 에디슨, 뉴턴 등 과학자 흉상 옆에 미래의 한국 과학자를 위한 좌대가 놓여 있다. 이처럼 세계적인 과학자 반열에 드는 한국인 과학자 탄생에 대한 염원은, 입시교육 체제에서 무지막지하게 재미없이 가르치는 중·고등학교 수학·과학 수업, 실험실 연구보다 연구과..
엔트로피와 햄버거 엔트로피라는 물리학 용어가 있다. 다른 전문 용어와 달리 엔트로피는 여기저기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개념이기에 비교적 익숙하다. 엔트로피는 흔히 무질서의 정도를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질서가 없고 혼란스러울수록 엔트로피가 높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릇에 콩과 팥을 잘 섞어 놓은 상태가 콩과 팥을 깔끔하게 분리해 놓은 상태보다 엔트로피가 높다. 하지만 엔트로피를 무질서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대강만 맞다. 그 이유는 물리학의 ‘질서’ 개념이 일상적 질서 개념과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와 관련된 무질서의 정도는 특정 ‘거시상태에 대응되는 미시상태의 개수’로 정의된다. 이때 거시상태란 큰 틀에서 볼 때 같은 결과로 파악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이에 대응되는 미시상태의 개수란 그 거시상태를 구체적..
성찰이 필요한 ‘생명공학의 질주’ “무엇을 상상해도 현실에서 이룰 수 있다. 아니 그 이상이다.” 10년 전부터 세계 생명공학계에서 줄곧 들려온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생명공학 기법이 개발되고, 이를 적용한 실험결과가 쏟아져 나온다. 생명체의 유전자를 변형하는 작업이 그 중심에 있다. 변형의 대상에 농산물과 가축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작은 2000년대 중반 미국에서 출범한 합성생물학 분야였다. 말 그대로 생명체를 합성하겠다는, 일반인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목표를 내세운 공학자들이 등장했다. 생명체의 기본 특성만을 갖추고 작동하는 무언가를 합성하려고 했다. 먹고 살 수 있는 대사 능력, 자손을 낳는 생식 능력, 그리고 변화되는 환경에 버티는 적응 능력 등을 갖춘 생명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략 살아 움직이기만 한다면 ..
몇 명이 모였나 세어보자 한 주제로 모인 군중의 수는 사안의 시급성이나 지지 세력의 위력을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렇기 때문에 각 진영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군중 수는 다르게 보이게 된다. 조금이라도 더 많았으면 하는 쪽과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쪽에서 내놓는 집계는 이 때문에 항상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일정 공간에 머물고 있는 사람의 수를 정확하게 계산해야 하는 이유에는 정치적 진영논리가 아닌 현실적인 요구도 있다. 저개발 국가의 낙후된 지역에 치명적인 전염병이 번지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출생·사망 신고조차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 정확히 알아내는 일은 사용할 백신의 양과 의료진 수, 나중에 주민을 따로 옮겨 거주하게 할 임시 숙소의 개수를 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초 작업이다. 가장 ..
시인을 위한 물리학 캠벨 수프 캔을 나란히 늘어놓은 그림으로 유명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스스로를 ‘심오하게 피상적인’(deeply superficial)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그가 죽기 일년 전 제작한 자화상에 딸려 있는 표현이다. 이 자화상은 워홀 사진 네 장을 실크스크린으로 겹쳐 인쇄해 평면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3D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해석에 따라 ‘deeply’는 그냥 ‘매우’처럼 다음에 오는 형용사를 단순히 강조하는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깊이와 표면을 각각 다른 품사로 표현하여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나는 이 표현이 이공계중심대학에서 인문사회 교양교육이 갖는 딜레마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올해 시작된 ‘제3차 과학기술인재 육성·지원 기본계획(2016~2020)’은 세부 추진과제 중 하나로..
빅데이터, 만능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선거 승리는 많은 사람에게 충격으로 여겨졌다. 각종 예측 결과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했던 힐러리 클린턴이 그토록 많은 표 차이로 패배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대통령 선거 제도의 기묘한 특징 때문에 클린턴이 실제 득표수에서는 앞서고도 선거인단 수에서 뒤진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근소한 차이도 아니고 완패를 당했다는 사실은 이변이었다. 당연히 선거 이후 왜 선거 예측이 틀렸는지를 놓고 여러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통상적인 확률 해석에 따르자면 클린턴이 높은 확률로 트럼프를 이길 것이라는 예측과 트럼프가 클린턴을 이긴 실제 선거 결과는 모순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동전을 던져 앞면이 연속해..
컴퓨터 버리는 방법 한 해 동안 버려지는 PC, 노트북이 100만대가 넘는다. 그런데 컴퓨터는 냉장고와 달라서 반드시 이전 흔적을 지우고 그것을 확인한 뒤에 버려야 한다. 외국 경우지만 중고시장에서 구한 PC의 하드에서 수만건의 환자 정보가 복원된 사례에서 보듯 무심코 버린 컴퓨터는 해커의 좋은 먹잇감이다. 컴퓨터에서 파일을 없애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버린 파일을 담아둔 휴지통을 비우는 작업도 파일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파일 메타정보에 ‘삭제됨’이라는 표시(tagging)를 하는 것이다. 메타정보 태그는 강시 이마에 붙이는 부적과 같다. 부적만 떼면 강시는 언제든지 다시 살아난다. 도서관 목록에서 특정 도서카드를 빼버리면 사람들이 그 책을 찾을 수 없는 원리와 같다. 그러나 그 책 자체는 도서관에 남아있어 ..
새로움은 가치가 아니다 첫애가 첫애일 수 있는 것은 둘째, 셋째처럼 다른 애들이 있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첫애는 외둥이가 되어버린다. 처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다음이 있어야 하는 게 사는 이치임에도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평가에서는 종종 이를 망각하는 제도가 설계되고 존속된다. 대표적인 것이 유사·중복연구 방지제도이다. 정부는 국가연구개발과제 수행 시 ‘국가연구개발사업관리 등에 관한 규정’ 제7조에 따라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시스템(NTIS)을 통한 과제 유사성 검토를 의무화하고 있다. NTIS 구축사업 경제성 분석에 관한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유사·중복 과제 방지를 통해 2005~2012년까지 총 630억원을 투입해 약 5409억원 이상의 예산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2013년 감사원에서 2008년부터 5년간..
위대한 과학 연구의 뿌리 올해도 어김없이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한국인 수상자는 올해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매년 반복되던 언론과 정부의 요란한 ‘뒷북치기’가 없었다는 점이다. 노벨상 발표 직후 언론은 ‘우리는 이래서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는 탄식을 쏟아내고 정부는 ‘이렇게 해서 곧 노벨상을 받겠다’는 기발한 전략을 제시하곤 했는데, 올해는 워낙 국가를 뒤흔든 대형 사건이 많아서인지 노벨상 정도는 호들갑 떨 사안이 아닌 것 같다. 사실 그래야 마땅하다. 노벨상은 해당 학문 분야에 지대한 기여를 한 학자에게 주는 것이지 그 학자의 ‘조국’에 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노벨상 위원회는 국가별 노벨상 수상자 숫자를 따로 집계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노벨상이 국민 대다수의 삶의 질 향상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 느슨한 GMO 검사기준 독성시험. 일반인에게 다소 섬뜩하게 들리겠지만 새로운 종류의 식품을 개발하고 심사할 때 당연히 거치는 과정이다. 미생물의 유전자가 삽입된 콩이나 옥수수 같은 유전자변형농산물(GMO)을 사람이 먹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심사할 때도 마찬가지다. 외래 유전자가 농산물의 유전자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지, 혹시 농산물의 기존 유전자에 변형이 생겨 새로운 종류의 독성물질이 만들어지지 않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주요 수단이다. 독성시험은 주로 쥐와 같은 실험동물에게 GMO를 일정 기간 투여하고 그 결과를 검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한국인이 섭취하는 GMO는 모두 정부의 안전성 심사를 통과했다. GMO 개발사는 독성시험 결과를 제시해야 하고, 심사위원들은 이를 포함한 다양한 자료를 검토해 수입 승인 여..
[사설]노벨 생리의학상 오스미 교수의 외길과 열정을 지지한다 ‘자가포식(autophagy)’은 세포 내 노폐물을 청소하고 비상시 에너지를 재활용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세포 내 불필요한 찌꺼기가 쌓이거나 영양분이 부족하거나 외부에서 미생물이 침입했을 때 세포 스스로 생존을 위해 내부 단백질을 재활용하는 면역현상이다. 만약 자가포식에 이상이 생기면 노폐물이 넘쳐 암이나 치매 같은 병을 일으킬 수 있다. 매우 유용한 노폐물 재활용 시스템이지만 ‘세포 내 쓰레기장’으로 치부된 탓인지 크게 주목을 끌지 못했다. 오스미 요시노리(大隅良典) 도쿄공업대 명예교수는 1970년대부터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이 분야에 천착했다. 1988년 세포 내 소기관에서 자가포식 현상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이후 3만8000여종의 돌연변이 효모를 일일이 검사했다. 그 결과 자가포식을 촉발하는 14..
우린 모두 우사인 볼트 대전역에 지금은 사라졌지만 두 평 남짓한 서점이 있었다. 언젠가 출장길에 그 서점에서 이봉주 선수의 자서전을 잠깐 읽었다. 서문에 이봉주 선수가 달리기에 대해 내가 평소 느끼던 상태를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무척 놀랐다. 나는 달리기를 나름 오래 한 축인데도 달리기를 하려 할 때마다 큰마음을 먹어야 한다. 별의별 핑계가 생기는 것이다. 일이 몰릴 때는 이렇게 바쁜데 오늘은 무리네, 아침 일찍 뛰겠다고 눈을 뜨면 왠지 몸이 뻐근하군, 오늘은 쉬어야겠네. 그런데 막상 나가 뛰기 시작하면 핑계를 언제 댔느냐는 듯이 상쾌하게 달리게 된다. 그런데 이봉주 선수도 아침에 눈을 뜨면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린다는 것이다. 비가 오네, 어제 너무 달렸네 하면서 오늘은 건너뛰고 싶은 이유를 찾다가 에이..
과학소설에는 ‘공상’이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문학적 맥락에서 허구란 “실제로는 없는 사건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해 냄. 또는 그런 이야기”를 의미한다. 한편 공상이란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봄. 또는 그런 생각”을 의미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과학소설(SF)에는 허구는 있지만 공상은 없다. 대신 과학소설에는 실제 과학 이론에 근거한, 삶의 다양한 모습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있다. 그럼에도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공상과학소설’도 등재되어 있는데, 그 정의는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를 벗어난 일을 과학적으로 가상하여 그린 소설”이다.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모든 허구는 현실적 시공간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볼 수 있기에 결국 공상과학소설에서도..
후성유전학의 메시지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과학이론은 평생 머릿속에 각인돼 있기 쉽다. 한때 거짓이라고 판명된 과학자의 주장이 어쩌면 옳았을지 모른다고 의문을 품는 사람은 일부 관련 연구자에 한정된다. 하지만 그 내용이 사람의 건강과 밀접히 연관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반인의 상식으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는 방사선 노출 같은 특별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 한 평생 변하지 않는다. 교과서에도 다윈과 동시대에 활동한 라마르크가 설파한 ‘획득형질의 유전’ 현상은 없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최근 생물학계에서 색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다. 유전자변형생물체(GMO)나 유전자 검사 등 일반인의 일상을 파고드는 생명공학의 산물에 대해서도 새롭게 의미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과학사학자 로렌 그래암 ..
메타이론으로 본 ‘공수처’ 세상에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만일 재미있는 정도를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하고 어떤 집단에서, 예를 들어 회사에서 가장 재미없는 사람을 골라냈다고 해보자. 그런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준다면 가장 재미없다고 찍힌 당사자는 우리에게 큰 재미를 안겨주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 것이다. 일차원적 ‘재미없음’을 넘어서는 고차원의 재미를 선사하는 셈이다. 이런 것은 평범한 재미의 단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재미, 즉 메타(meta)적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웃기는 것 빼고 모두 가능하다는 역설적 캐릭터로 인기를 끈 한 개그맨의 메타 전략이 생각난다. 사물과 개념을 다양한 차원으로 접근하는 메타적 분석력은 현실에서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메타적 접근은 어느 분야나 존재한다. 개별 행..
한여름밤의 테슬라 명연설로 회자되는 스티브 잡스의 2005년 스탠퍼드 졸업식 축사는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말로 끝난다. 이 구절은 70년대 중반 잡스가 애독하던 ‘지구백과’라는 잡지가 폐간될 때 편집자가 마지막 호 뒤표지에 실은 고별의 글이다. 억만장자인데다가 한참이나 똑똑했던 이가 남들보다 잘나가는 미래가 예측되는 수재들 앞에서 정반대의 조언을 던진 것은 의외였다. 나는 오래도록 왜 잡스가 수십년 전에 접한 이 구절을 기억하고 자서전적으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았던 연설을 이 구절로 마쳤을까 궁금했었다. 전기요금 폭탄이 날아올까 조마조마하던 여름에 현대 전기시스템의 근간인 교류전기를 개발한 니콜라 테슬라의 전기를 읽으면서 이 궁금증에 대해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2015년 버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