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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겪고 나면 달라진다 듣고 읽어 알기는 어려워도 직접 겪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내가 겪은 과거의 경험은 머릿속 어딘가에 각인되어 나를 바꾼다. 우리 각자뿐 아니다.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도 그렇다. 함께 겪은 모두의 경험은 우리 사회를 바꾼다. 1980년 광주, 2014년 세월호 등이 그렇다. 겪고 나서 마주한 세상은 겪기 전과 달라진다. 여럿이 공유한 시공간의 한곳에서 함께 겪은 것들이 모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빚어낸다. 나나 우리나 겪고 나면 달라진다. 과학에도 경험이 중요하다. 뉴턴의 운동법칙 F=ma 수식을 외우고 있다 해서 고전역학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론을 먼저 설명하고 구체적인 상황에 이를 적용해 문제를 직접 풀어보는 경험을 꼭 갖도록 하는 것이 대학교 물리학 수업의 기본이다. 다양한..
우리 엄마 젖을 다오 북한강 중간께의 청평에는 안전 유원지가 있었다. 매표소를 지나 처음 만나는 집은, 낮에는 음식점이고 밤에는 사이키 조명 아래 춤을 출 만한 공간도 있었다. 그러니 종업원 중에는 덩치 큰 친구도 있었는데, 듣기로는 씨름 선수 출신이라고 했다. 오가는 손조차 뜸한, 비 오는 어느 날 나는 그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참외 줄랴 참외 싫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애잔한 기타 선율과 함께 오래전에 들었던 낮은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아마도 그는 수유(lactation)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애착 또는 접촉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눈을 마주하며 정온동물끼리 체온을 나누는 일이 사회적 결속력을 다지는 강력한 수단이었음은 우리 유전자에도 새겨져 있다. 해마다 오월이 돌아오는 걸 보면..
질량 작을수록 쉽게 움직이고 쉽게 멈춘다 같은 힘으로 밀어도 쉽게 움직이는 물체와 잘 움직이지 않는 물체가 있다. 커다란 바위는 아무리 밀어도 꿈쩍하지 않지만, 크기가 작은 바위는 조금은 움직일 수 있고, 이보다 더 작은 돌멩이는 슬쩍 밀어도 쉬이 움직인다. 힘으로 밀 때 물체가 안 움직이려고 뻗대는 정도가 물리학의 질량이다. 물질의 양이 많으면 질량도 크다. 작은 당구공이 커다란 볼링공보다 쉽게 움직이는 이유다. 질량이 큰 물체가 가만히 정지해 있으면 밀어도 잘 움직이지 않고, 막상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추기도 어렵다. 멈춰 있다 움직이거나, 움직이다 멈추거나, 물체의 운동 상태가 변한다. 물체가 현재의 운동 상태를 지속하려는 경향을 관성이라고 한다. 질량이 바로 관성의 척도다. 질량이 클수록 관성이 크고, 운동 상태의 변화에 더 강하게 저항한..
지표면의 유일한 생산자, 잎 봄인가 싶어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사위가 어둡다. 나무 잔가지 사이의 빈틈이 하루가 다르게 채워진다. 그에 따라 화려한 사치재인 꽃은 사위어 가거나 어둠 속에 잠긴다. 한 이십 년도 더 된 어느 봄날, 성산동 굴다리 지나 수색, 화전을 향해 가다 서오릉 표지판을 보고 샛길로 접어들어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서 나는 내 인생의 또 다른 봄을 보았다. 봄은 채워짐이었다. 야트막한 산에는 가을이면 떨어질 운명인 이파리들이 그야말로 만개한 상태였다. 새로 돋은 활엽수 이파리들은 꿈처럼 눈부셨다. 그 뒤로 나의 봄은 늘 저리 어둡고 밝았다. 한 해가 시작되고 100여일 지날 무렵이면 한반도에도 잎 소식이 들려온다. 그 뒤로 200일 남짓 잎들은 대기와 식물이 만나는 접촉면 노릇을 오롯이 해낼 것이다. 바늘잎 식물도..
진동수가 같아야 공명도 크다 아이 그네를 밀어주던 때가 생각난다. 그네는 앞으로 갔다가 내가 있는 뒤쪽으로 다시 돌아온다. 다시 앞으로 막 움직일 때 그네를 미는 것이 좋다. 이렇게 반복하면 그네는 점점 더 높이 오르고 아이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이보다 내가 더 즐거웠던 시간이다. 이렇게 그네를 밀어주는 것은 물리학의 ‘공명’과 관계가 있다. 함께 울린다는 뜻이어서 우리말로 ‘껴울림’이라 한다. 그네 밀기의 원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초에 한 번 그네가 다시 다가오면 3초에 한 번 밀면 된다. 3초보다 짧은 간격이면 그네가 다가올 때 밀게 되어 팔이 아프고 그네의 속도는 오히려 줄어든다. 3초보다 긴 간격으로 밀면 그네가 이미 저 앞에 있어 허공에 대고 헛수고를 하게 된다. 그..
무심한 질소 기다림은 인간의 일이고 행성의 움직임은 우주의 일이라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계절은 바뀔 게고 그렇게 봄은 왔다. 봄이 오니 서둘러 산수유가 노랗게 꽃을 틔웠고 벚꽃도 곧 필 것이다. 식물이 꽃을 피우는 뜻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그 소임을 다한 꽃이 지면 열매를 키우는 몫은 잎이 전담한다. 하늘 높이 태양이 떠오르면 식물은 일제히 기공(氣孔)을 열고 이산화탄소를 흠뻑 들이켠다.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액체로 환골탈태한 뒤 설탕으로 흐르다 저장 기관에서 고체로 안착한다. 쌀알이나 옥수수, 알밤이 그런 것이다. 이런 모든 일은 빠르고 실수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산화탄소를 고정하는 재료와 에너지 모두 수명이 짧기 때문이다. 너무 느리면 전자 전달계 고압선을 흐르는 전자가 밖으로 튀어 나가거나 에너지가 헛..
[김범준의 옆집물리학]물리학의 단열, 세상 속 단절 어릴 때 사용한 유리 보온병을 기억한다. 안쪽 유리병을 바깥 유리병이 둘러싸고 있는데 둘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었다. 둘 사이의 안쪽 면은 거울처럼 도금해놓기도 했다. 바닥에 떨어지면 잘 깨져 낭패를 본 적도 많았다. 왜 유리 보온병은 잘 깨졌을까? 얼굴을 비춰 볼 수도 없는데 왜 거울처럼 도금을 했을까? 온도가 다른 두 물체를 딱 붙여 놓으면 온도가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열이 전달된다. 높은 쪽의 온도는 내려가고 낮은 쪽의 온도는 올라간다. 결국 둘의 온도가 같아지는 열평형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온도가 다른 두 물체를 붙여 놓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아니, 온도가 더 높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모든 물질은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이 허락한 가장 낮은 온도인 절대영도가 아니라면 분자..
당신의 간은 밤새 안녕하십니까 간은 붉다. 들고 나는 피의 양이 많기 때문이다. 쉴 때 간은 우리 몸에 필요한 전체 산소의 약 20%를 쓴다. 유난히 붉은 색조를 띠는 기관은 산소와 피의 요구량이 크다고 보면 대체로 틀림이 없다. 콩팥과 심장도 그런 곳이다. 이들 두 기관과 달리 간에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혈관이 연결된다. 산소를 듬뿍 담고 심장에서 출발한 신선한 피는 간에 들어오는 피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나머지 혈액은 소장과 대장에서 온다. 이렇듯 우리 몸의 가운데를 관통하는 소화기관에서 소화하고 흡수한 영양소가 일차로 결집하는 곳이 간이다. 그렇기에 간은 몸의 안과 밖을 잇는 경계에 선 관문이다. 음식을 많이 먹어 영양소의 양이 늘면 간은 커질까? 그렇다. 2017년 스위스 제네바 대학 쉬블러 연구팀은 생쥐의 간이 24시..
[김범준의 옆집물리학]세상 모든 것은 확률로 돌아간다 가만히 손에서 놓은 돌멩이는 아래로 떨어질까? 영화 속 유령처럼 사람이 스르륵 벽을 뚫고 지나갈 수 있 을까?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는 걸까? 내가 백신을 맞으면 코로나19에 안 걸리는 걸까? 과학은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런데 100% 확실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우주선 안이라면 제자리에 둥둥 떠 있을 수 있으니, 아래로 떨어지는 돌멩이도 상황이 달라지면 항상 맞는 얘기는 아니다. 에너지 장벽을 입자가 스르륵 통과하는 양자터널효과를 생각하면 어쨌든 입자로 이루어진 사람이 벽을 통과할 확률이 정확히 0인 것은 아니고, 엔트로피도 항상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백신을 맞았다고 앞으로 계속 100% 안전한 것은 아니다. 입자의 수가 어떻고, 고립계가 어떻고, 엔트로피 증가를 설명하면, ..
밤 긴 겨울엔 나우 자자 소나무는 양지바른 곳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소나무가 이 추운 겨울날 푸른 잎을 매달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이다. 동지 지나 아직 짧은 햇살일망정 광합성에 쓰려는 사철 푸른 나무의 시도가 사뭇 애처롭다. 하지만 광합성 작업에는 햇볕 말고 물도 필요하므로 땅 아래 소나무 뿌리로 흐르는 물이 얼어 있으면 안 된다. 누런 솔가리로 아랫도리를 감싼 소나무는 태양으로부터 광속으로 8분이나 걸려 찾아온 빛 에너지를 애면글면 보존한다. 이제 소나무 잎 안에 든 엽록체는 이산화탄소를 고정하여 적은 양이나마 포도당을 만들 수 있다. 이와 달리 일찌감치 잎을 떨군 활엽수들은 지난해 저장해둔 탄수화물을 쓰면서 삼동을 난다. 그렇기에 겨울 활엽수는 동물과 하등 다를 바 없이 호흡하고 이산화탄소를 내보낸다. 이것이 여름..
[김범준의 옆집물리학]상식도 바뀌지만 ‘방향’은 있다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지식이 ‘상식’이다. 손에서 가만히 놓은 돌멩이는 땅으로 떨어진다는 것, 지구가 둥글다는 것, 그리고 백신이 감염병 확산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도 상식이다. 이런 상식에 많은 이가 동의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가 동의하는 것은 또 아니다. 돌멩이가 저절로 하늘로 치솟는다고 믿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지만,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은 지금도 간혹 있고, 다양한 생명이 진화의 과정 없이 한순간 등장했다고 믿는 사람, 전 지구적인 기온 상승이 거짓이라고 믿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나의 상식이 세상의 상식과 다르면 먼저 나의 상식을 의심해 볼 일이다. 과학 지식이 아닌 상식도 많다. 식탁에서 코 푸는 사람을 예의 없다 생각하며 후루룩 국물을 들이켜는 나를 그 외국인은 거꾸로..
지구에는 배설기관이 없다 바다는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을까?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원시 지구 안 마그마에서 분출한 수증기가 지표면 온도 하강에 따라 비로 떨어져 내리며 바다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생명과 상상력의 원천인 바다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아주 오래전 오랜 기간에 걸쳐 벌어진 사건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우리는 지구를 달걀에 빗대 지표면과 맨틀 및 핵으로 구분한다. 짐작하듯 맨틀은 흰자, 핵은 노른자에 해당한다. 지각 아래 맨틀이 차지하는 공간은 지구 부피의 약 80%이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바다와 빙하 및 지하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무려 25배가 많은 양의 물이 들어 있다. 활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휘발성 물질의 83%가 수증기라는 점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대양과 남극의 빙..
[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신경기술을 통한 신경과학 발전 필자는 2017년부터 지금까지 경향신문 지면에 칼럼을 써왔다. 시의성이 있거나,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는 소재(예: 동물 사이의 공감 등)를 연구한 논문 중에서도 ‘네이처’나 ‘사이언스’급 저널에 실린 논문을 주로 소개해왔다. 하필이면 이들 저널에 실린 논문을 고른 데는 이유가 있다. 역사가 깊고 피인용지수가 높은 이 저널들의 엄격한 동료 평가제도와 책임감을 신뢰하고 있기도 하고, 이 저널들에 대한 일반인의 신뢰에 기대는 측면도 있었다. 지금이야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필자는 학위를 마치기도 전에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직위의 원로 연구자도 아닌 데다 드문 여성과학자로서 이야기하자니 공연히 위축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원래 건전한 과학 소통에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이런 염려 때문에라도..
까마귀 온다 수원에 까마귀 떼가 나타났다. 2016년 유난히 따뜻했던 겨울에 첫 모습을 드러냈던 까마귀가 벌써 몇 년째 찾아든다. 울산이나 김제처럼 사방으로 너른 들녘에서 나락이나 지렁이를 먹던 까마귀는 밤이면 근처 나무숲에 잠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울산 태화강변 대나무숲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숲과 논을 오가며 겨울을 지낸 까마귀는 다음해 3월이면 어김없이 날개를 틀어 번식 장소인 북으로 향한다. 수원 까마귀도 그럴 것이다. 강남 갔던 제비는 삼월삼짇날쯤에 한반도를 찾는다. 붉은 목에 배가 흰 어미 제비는 부산히 벌레를 날라 서너 마리의 새끼를 먹여 살린다. 봄에 한국을 찾는 제비는 여름 철새이다. 겨울 철새인 까마귀는 시베리아나 만주에서 여름을 나고 한반도나 일본에서 월동한다. 사실 모든 생명체는 먹을 것이 풍부..
[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앞사람이 쌓은 것을 딛고 진전하는 세상 자신의 연구를 동료 연구자에게 소개하는 역량과 대중이 잘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소개하는 역량은 다르다. 그래서 뇌과학 연구를 하면서 대중을 위한 저술도 활발히 하는 과학자는 많지 않다. BBC 다큐멘터리 을 제작한 데이비드 이글먼,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릭 캔들, 오랫동안 공포와 불안을 연구해 온 조지프 르두 정도다. 얼마 전 조지프 르두를 줌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EBS에서 교육부와 평생교육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전 세계에 흩어진 각 분야 대가들의 강연을 이라는 시리즈로 방영하고 있는데, 그중 조지프 르두 편의 감수를 맡았기 때문이다. 나는 신경과학 연구를 처음 시작하던 2000년대 중반에 르두 교수의 논문을 읽었다. 당시 나는 감정에 관심이 있었는데,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뇌과학에서 ..
2021년 떠오르는 10대 기술 세계경제포럼이 ‘2021년 떠오르는 10대 기술’을 16일 발표했다. 올해로 10번째를 맞이한 이 리스트에는 예년과 같이 흥미로운 기술들이 포함되었다. 첫 번째는 탈탄소 기술이다. 휘발유나 경유 자동차를 전기자동차로 바꾸는 잘 알려진 것 이외에도 탄소중립 에어컨디셔너, 저탄소 시멘트, 신재생에너지, 고기 없는 단백질 등이 총체적으로 빠르게 개발돼 적용되어야 한다고 제시되었다. 두 번째는 자체 영양 제공 식용작물 재배 기술이다. 콩과 식물은 질소비료를 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 이유는 뿌리에 박테리아들이 자리 잡아 노듈이라는 것을 형성하고, 그 박테리아들이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모방하여 노듈을 형성하지 못하는 식용작물들도 노듈을 형성하게 엔지니어링하거나, 아니면 질소를 고정하지 못하는 토..
[요리에 과학 한 스푼]잘 섞음의 원리 요리를 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섞음’일 것입니다. 여러 식재료들을 알맞게 준비하고 잘 섞어주면서 최상의 맛을 끌어내는 것이 바로 요리이기 때문입니다. 식재료가 고체라면 서로 섞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액체 상태인 경우라면 조금은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과학에서는 ‘Likes dissolve likes’라는 말이 있습니다. 번역해보면 ‘비슷한 것들은 비슷한 것들을 녹인다’ 정도가 되겠네요. 액체에 다른 어떤 것을 녹일 때 서로 비슷한 성질이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잘 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과학자들이 서로 비슷한 것들을 분류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친수성과 친유성입니다. 친수성이란 물과 친한 성질, 친유성은 기름과 친한 성질인데요. 다시 말해..
[김범준의 옆집물리학]낙엽, 비워서 채우려는 나무의 안간힘 가을이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 캠퍼스는 가을 풍경이 정말 멋지다. 교목인 은행나무가 환한 노란빛으로 온통 꽃핀 듯 변하고 교내 여러 나무가 울긋불긋 단풍으로 색색이 물든다. 가을에 접어들어 단풍으로 물든 나무는 오래지 않아 낙엽을 떨군다. 더운 날씨가 일년 365일 이어지는 열대의 나무는 잎을 떨굴 필요 없고, 추운 날씨만 이어지는 고위도 지역 상록수는 약한 햇빛을 일 년 내내 이용하려 사시사철 푸르다. 우리 눈을 즐겁게 하는 멋진 가을 단풍은 우리나라의 적당한 위도 덕분이다. 가을날 단풍 들어 낙엽 진 나무는 다음해 봄 푸른 잎을 틔워 여름날 무성한 녹음을 다시 이룬다. 나무의 푸른색은 태양에서 오는 빛에너지 중 파란색과 빨간색 부분의 파장을 엽록소가 주로 이용해 광합성을 하기 때문이다. 파란색과 빨간..
인간은 왜 개와의 평화협정 위반할까 “개껍닥 갖다 고구마 줘라”라는 엉터리 말에도 나는 소쿠리를 들고 봉당 개밥그릇으로 향하곤 했다. 어릴 적 일이다. 두 귀가 늘어지고 반가우면 등 뒤로 말린 꼬리를 부산히 흔들며 다가서던 개와 나는 마당이 좁도록 뛰며 종일 함께 놀았다. 날이 저물어 서녘 하늘에 개밥바라기별이 뜨면 종지에 약지와 중지를 넣고 개밥이 너무 차거나 뜨겁지 않은지 혹은 간이 맞는지 확인하던 어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학교 다녀온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그 황구를 마지막으로 지금껏 개와 다시 인연을 잇지 못했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가축화되었다는 개의 숫자는 계속 늘어서 현재는 10억마리가 넘는다. 인구 1000명당 약 130마리에 해당하는 값이다. 개의 분포는 지역적으로도 차이가 크다. 남북 아메리카 사람들은 1000명당..
[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번역청을 세워주세요 전공인 수학·과학을 제외하면, 중·고등학교 교과목 중 살면서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영어다. 영어는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온갖 자료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고, 한국어를 쓰지 않는 수많은 이들에게 나를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작은 나라 한국에 태어났으면서도 세계의 변화를 따라가고, 내 성과를 인정받게 해준 것은 영어였다. 그래서인지 상당수 직장에서 영어 실력을 요구하고, 많은 사람이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해마다 한글날이면 세종대왕께 감사하지만, 그러면서도 영어 공부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인공지능이 발전하면 영어 따윈 필요 없을 거라며 위안도 해보지만, 우리말의 번역은 유난히도 더디다. 구글 번역기조차도 문화와 어순이 다른 한국어를 제대로 번역해내지 못한다..
의학과 공학 융합의 꽃, 디지털치료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구이기도 하지만 건강한 사회를 구현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4차산업혁명 시대로 대변되는 엄청난 속도의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의료와 제약업계도 변혁을 불러오고 있으며 디지털치료라는 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코로나19는 심각한 공중보건위기가 언제든지 올 수 있으며 이동 및 접촉이 용이치 않거나 권장되지 않는 조건에서 진단과 치료가 정보통신기술의 도움을 받도록 해야겠다는 타당성을 더욱 높였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가상현실, 증강현실 등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고 증거에 기반하여 예방, 진단,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제품을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라고 부른다. 영어로 Software as Medical Device(SaMD)라고 한다. SaMD 중에서 실질적으로 치료 유효성..
[요리에 과학 한 스푼]천연 주스가 더 맛없는 이유 화장실 가기가 힘들다는 아내를 위해 직접 과일 주스를 만들었습니다. 오렌지, 자몽, 키위 등 신선한 과일을 준비하고 물을 조금 첨가한 후 믹서기로 가는 단순한 방식인데요. 즙만 짜내는 것보다는 변비에 효과가 더 좋습니다. 이왕 하는 김에 아들 것도 함께 준비했습니다. 시중에 파는 주스처럼 건더기는 걸러내고 즙만 담았죠. 그런데 아들 표정이 영 좋지 않습니다. 과일 주스맛이 아니라고 하네요. 좋은 과일만 엄선한 아빠표 주스보다 편의점 주스가 더 주스답다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사실 가공 주스가 더 진짜 같은 것은 바로 향 때문인데요, 보통은 천연 과일을 연상케 하는 합성 착향료를 사용합니다. 산성 물질과 알코올을 반응시키면 에스터라 불리는 물질이 만들어지는데, 이 가운데 과일 향을 내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김범준의 옆집물리학]‘투명’한 세상을 기다리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깊은 물과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기 어려운 사람의 속마음을 비교한 속담이다. 사람의 몸은 물과 달라 가시광선을 투과하지 못하니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다. 물론 사람 몸이 투명해도 그 안 속마음이 눈에 보일 리 없지만. 한 길 사람 속을 보는 방법이 있다. 파장이 짧은 엑스선을 이용하면 조직마다 다른 투과율 차이를 이용해 몸 안을 흑백사진으로 볼 수 있다. 유리가 투명하다 하지만 이것도 보는 방법에 따라 다르다. 차 안에서 앞 유리를 통해 맨눈으로 원자폭탄 실험을 바라보았다는 리처드 파인먼의 일화가 기억난다. 우리가 눈으로 볼 때 이용하는 가시광선에 투명한 유리도 짧은 파장의 전자기파는 잘 투과하지 않아 가능한 일이다. 물도 그렇다. 가..
RNA 세상 지구상 모든 생명체는 딱 세 집단으로 나뉜다. 세균, 고세균 그리고 진핵세포이다. 세균과 고세균을 뭉뚱그려 원핵세포라고 하면 이제 생명체는 둘 중 하나에 속한다. 대장균은 원핵세포이고 그보다 덩치가 훨씬 큰 데다 뒷발로 걷는 인간은 진핵세포 소속이다. 문자 그대로 진핵(眞核)세포는 핵이 있는 생명체를 일컫는다. 술 빚는 효모와 남산 위 소나무에는 핵이 있는 반면 원핵세포에는 핵이라 부를 만한 구조가 없다. 흔히 ‘씨 도둑질은 못한다’고 말할 때 씨에 해당하는 유전자가 바로 핵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원핵세포에는 유전자가 없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대장균도 자식 대장균에게 물려줄 유전자를 갖지만 이를 둘러쌀 강보 같은 핵이 없을 뿐이다. 어떤 세포든 무슨 일을 하려면 단백질을 만들어야 한다. 움직이려면..
몸과 생각의 에너지 조율 한낮이면 35도를 넘던 여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을이다. 일교차가 10도 가까이 벌어졌고 한두 달만 더 지나면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것이다. 환경이 크게 변하는 데 반해 신체의 내부는 그렇지 않다. 정상적인 생명 활동을 위해서는 체온, 삼투압, 혈압, 혈당 등의 조건이 일정한 범위에서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뇌는 이와 같은 항상성의 유지에도 관여하고 있다. 체온, 혈압, 혈당 등은 기계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조절되어야 한다. 혈당을 생각해보자. 맹수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스트레스 상황에는 근육이 에너지를 끌어다 쓰기 쉽도록 혈당이 높아지고, 안전한 곳에서 백일몽을 꿀 때는 혈당이 낮아져야 한다. 이처럼 외부 환경에 맞게 움직이면서도 혈당을 ‘적절하게’ 조절하기란 쉬운 일이 아..
저궤도 통신위성, 별들의 전쟁 1992년 KAIST 인공위성연구소는 우리별 1호를 개발해 발사했다. 인공위성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이 인공위성 보유 국가 대열에 합류하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우리별, 차세대 소형 위성, 다목적 실용 위성 시리즈 등 다양한 지구 관측용 인공위성들을 개발·발사했고 위성을 수출할 정도의 기술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예산 등의 한계로 통신위성 개발에는 다소 소홀하지 않았나 싶다. 2010년 천리안 1호를 발사했으나 통신 전용의 인공위성이 아닌 기상관측, 해양관측 그리고 공공통신을 위한 복합기능의 정지궤도 인공위성이었다. 또한 국내 유일하게 위성통신 상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정지궤도 무궁화위성은 총 4기로 모두 해외에서 수입해 운용 중이다. 그러다 보니 민간 수요가 가장 많고 국가 기간망으로 활용이 가능하..
[요리에 과학 한 스푼]양념장의 또 다른 비밀 보기만 해도 얼큰한 해물탕 한상이 차려졌습니다. 바지락, 꽃게, 새우, 가리비, 전복 등등, 바로 내가 해산물 대표라 자랑이라도 하듯 커다란 냄비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고춧가루, 고추장, 된장, 마늘, 생강에 주인장의 특별한 비법 몇 가지가 더해져 만들어졌을 양념장 때문인지 요리는 진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모든 요리가 그러하듯 탕요리의 맛을 결정하는 것 또한 우선은 신선한 식재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양념도 빼놓을 수 없죠. 양념은 식재료 본연의 맛을 최상으로 이끌어내고 때로는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장만의 맛깔난 솜씨는 대부분 여기서 결정됩니다.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과학자 입장에서 보면 해물탕이 맛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열이라 할 수 있..
[김범준의 옆집물리학]‘순환’이 만든 혁명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elestium)’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회전 혹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환을 뜻하는 영어 revolution에 해당하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 있다. 지구중심설(천동설)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지동설)로 인간이 바라본 우주의 모습이 급변하게 된 것을 과학사에서는 코페르니쿠스 혁명(Copernican revolution)이라 한다. 태양이 중심인 행성 운동의 순환(revolution)이 만든 혁명(revolution)이다. 머리를 들어 올려본 하늘에는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것이 많다. 밤에 본 달의 모습은 약 한 달을 주기로 다시 반복한다. 우리가 한 달을 한 달이라고 하는 이유다. 유심..
호박에 줄 그어 수박 만들기 철 지난 바닷가는 황량하고 쓸쓸하다. 백로(白露) 지나 수온이 23도 아래로 떨어진 해수욕장은 폐장한 지 오래다. 체온과 10도 이상 차이가 나면 저체온증이 찾아올 수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바닷물에 몸을 담그지 않는다. 하지만 간혹 우리는 백사장 한 모퉁이에서 의외의 기쁨과 마주치기도 한다. 가녀린 수박 넝쿨에서 주먹만 한 수박을 발견했을 때다. 분명 수박 씨앗은 여름 한 철 사람 위장관의 소화액 세례를 듬뿍 받고 서둘러 모래밭에 뿌리를 내렸을 게다. 이울어 가는 태양빛은 수박을 온전히 키우지 못하겠지만 수박 껍질에는 짙은 초록빛 띠가 선명하다. 박과 사촌인 수박은 약 1500만년 전에 지구상에 등장했다. 멜론이나 오이, 호박은 그 전에 분기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침팬지와 공통 조상에서 사람속 생명체..
[송민령의 뇌과학 이야기]‘위드 코로나’의 문제 설정 공학은 목표를 달성할 수단을 제공한다. 예컨대 날씨가 더울 때면 선풍기 등 체온을 낮출 수단을 제공한다. 공학 덕분에 우리는 수천년 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기적을 매일 누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공학으로 난관을 타개하려 할 때 반드시 선행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1) 어떤 문제를 풀지, (2) 한계 조건이 무엇인지, (3)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가 목표인지를 명확히 정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호복을 입은 구급대원들이 너무 더워서 일하기 힘든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 경우의 문제는, 방호복 때문에 구급대원들의 체온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한계 조건은 구급대원의 활동성을 보장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하면서도 체온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가격이 비싸지 않아야 하며 사용법도 쉬울수록 좋다. 문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