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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연휴 직후부터 3일에 한번씩 새벽 5시가 다 되어 집에 겨들어옵니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도 적응이 쉽지는 않습니다. 점심 때 일어나면 평일에도 반나절의 여유가 생기지만, 이 시간을 생산적인 일로 승화할 정신상태에 이르지 못합니다. 멍하게 드라마나 보다가 다시 잠을 청하는 식이죠. 덕분에 새벽마다 새로 사귀었던 치킨, 닭발, 오징어순대 등 줄기찬 야식은 제 몸 속으로 들어와 에너지가 되었다가 지방으로 안착하면서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 몸의 질량은 보존되지 못하였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5번째 야근을 하고 돌아온 어제는 그나마 정신이 조금 말짱한 듯하여 책을 한권을 읽었습니다. 지난해 11월 발간된 <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물리학자 이승헌의 사건 리포트>입니다. 중간중간 멍 때려도 2시간이면 테이프를 끊을 수 있는, 그러나 다 읽은 후에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입니다. 

이승훈, 창비, 13800원


  천안함 사건을 육하원칙을 넣어 한문장으로 구성해보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겁니다.

"2010년 3월 26일 21시 26분 백령도 앞바다에서 ?가 대한민국 초계함 '천안'을 ??때문에 침몰시켰다."

  민군 합동조사단의 발표가 있었지만 첫번째 '?'를 북한 잠수정으로, 두번째 '?'를 어뢰로 바꿔넣기에는 아직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용기있는 사람들이 합조단 발표의 허점을 지적했고, 합조단의 해명은 언제나 엉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진짜 범인을 찾을 충분한 증거가 국민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마도 천안함 사건이 단순히 과학적 이슈가 아니라, 국가안보적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초기에 증거라고 공개된 것들은 서로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군은 더 이상의 증거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한정된 증거는 진실을 찾는 노력들을 추측과 음모론으로 포장해버렸습니다.

언론은 초반부터 제 역할을 다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흔히 보수라 말하는 진영에서는 북한의 전쟁도발에 대한 우려를 자극하기에 열을 올렸고, 진보라 분류되는 진영에서는 신뢰할 만한 자료가 없어 대놓고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그럴수록 과학계의 목소리는 더 중요해졌습니다. 사실 이 사건의 육하원칙 중 ‘어떻게’를 규명하려면 과학만한 수단이 없습니다. 과학은 대부분의 경우 명확한 답을 목표로 하니까요. 그리고 ‘어떻게’가 규명된다면 운 좋게 ‘누가’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국내 과학계는 사실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통일된 의견을 내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과학자는 국가의 주장을 대변했고, 아주 소수의 과학자가 이를 반박했으며, 대부분의 과학자는 침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빛났던 건 해외에 거주하던 학자들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전문가였고, 열정적이었습니다. 

  존스홉킨스대학 국제정치학과의 서재정 교수와 버지니아대 물리학과의 이승헌 교수가 바로 그들입니다. 서재정 교수는 가장 먼저 합조단의 조사결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이승헌 교수는 엑스선회절(XRD) 분야의 전문가로서 이 논란에 가세했습니다. 나중에 에너지분광(EDS) 분야의 캐나다 마니토바대학 지질과학과의 양판석 교수도 합조단의 결과에 물음표를 덧붙여줬습니다. 이승헌 교수에 따르면 이들은 고향도, 이념적 지향도 다르지만, 과학적 진실을 찾는 데에 있어 한 팀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과학의 양심...>은 이승헌 교수가 도쿄대학 초빙교수로 여름방학을 보내러 왔다가 우연히 천안함 사건에 말려들었던 5달간의 일을 일기처럼 정리한 책입니다.
이 교수의 주장은 초지일관 ‘북한이 했다 안 했다’가 아니라, 합조단의 조사 결과에 결함이 있으니 다시 조사하라는 겁니다. 폭발장소 근처에서 발견됐다는 어뢰 파편을 증거로 제시하려면, 1번 글씨가 실제로 타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는지, 산화알루미늄이 폭발물질 속의 알루미늄인지 자연적으로 생긴 수산화알루미늄인지를 공개적으로 다시 실험하라는 겁니다. 

  책을 읽으면서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은, 해외전문가들까지 포함됐다는, 그리고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이 포함됐다는 민군 합동조사단에서 전문가들로서는 할 수 없는 해명을 즐겨 사용한다는 겁니다. 닥치는 대로 이유를 갖다대서 원래 주장을 고수합니다. 과학적 주장은 동료 과학자들의 실험으로 재현되지 않으면 신뢰성을 의심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가설이 틀렸다면 폐기하고 다른 가설을 세우는 게 옳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승훈 교수
는 국내 언론뿐 아니라 해외 과학저널 에디터들과 유명 언론 기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달해 공론화시키려 애를 썼습니다. 놀라운 건,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가 이 교수에게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대부분 “그럼 누가 했다는 건가요” 혹은 "어뢰가 아니면 뭐라는 건가요"였다는 겁니다. 어뢰라고 주장의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을 규명할 정도의 정보밖에 없는 상태에서, 답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과학이 밝힐 부분은 ‘어떻게’였는데, ‘누가’를 물어 답이 나오지 않으니 다른 모든 주장들을 ‘킬’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조중동에서 천안함 보고서에 관한 논란을 거의 다루지 않았던 것과, 일본에서의 기자회견을 악의적으로 왜곡한 것 등 각 언론사의 정치적 색채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인터뷰 따로 기사 따로인 경우는 흔합니다만, 이 교수가 자료를 보냈는데도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기사화하면서 이 교수 측에서는 대답이 없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니 씁쓸해집니다.



  어쨌건 이들의 싸움에는 몇몇 진보언론들이 힘을 보탰습니다. 두 학자는 원래 안면이 있었지만, 이승헌 교수가 이 사건에 뛰어든 계기는 우연히 서재정 교수의 프레시안 기고였습니다. 그리고 최문순 의원의 기자회견 등에는 익명으로 등장했던 이승헌 교수가 처음 실명을 공개한 글은 서재정 교수와 함께 쓴 경향신문 기고였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이후 경향신문의 활약상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경향에서 서재정교수의 전면 인터뷰가 나간 적은 있습니다만.)

  천안함 사건의 논쟁적 이슈에 대해 가장 열심히 보도한 곳은 프레시안이었습니다. (두 명의 기자 이름이 거론되는데, 저의 고등학교 동창 중 가장 유명하신 강모 기자가 이공계 출신의 탁월한 기자로 등장하더군요.) 그리고 한겨레도 시간이 좀 지난 뒤 <한겨레21>과 훅과 사이언스 온 등 온라인 매체로 지원사격을 했다고 합니다. 노종면 기자가 팀장으로 있던 ‘언론 3단체 검증위‘도 한 몫을 했다고 하고요.



  중간중간 등장하는 언론 기고글들을 보니 저도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작년 초여름께 미디어담당 부서 부장께서 글을 하나 들고 와서 “쏘댕씨, 이거 읽어보고 이해가 되는지 좀 알려줘”라시더군요. 이제 보니 책 53P에 등장하는 <민관합동조사단의 천안함 보고서의 ‘흡착물질 분석‘ 부분에 대한 비평>입니다.


  글을 읽은 뒤 어떤 환경에서 비결정질이 생기는 건지 의문이 생겨 인터넷 검색을 했으나, 잘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룬 프레시안 기사와 엑스선회절 분석/에너지분광실험 결과 그래프를 챙겨본 다음 기본적인 내용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담당 부장께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이해되는데, 그래프가 같이 나가야 좀 더 명확하게 이해가 갈 것 같다. 그리고 프레시안에는 나온 내용과 대동소이하다"고 말했는데 결과적으로 ‘킬’됐습니다. 사안이 진전된 부분이 없을 때 기사화하는 것이 어려운데, 조금이라도 다른 팩트를 찾거나 공론화를 위해 여러번 기사를 쓰는 경우는 정말 의지를 가진 경우일 겁니다. 이 부분에서 소홀했던 것이 아쉽습니다.

본문과는 무관하지만, 진주만에서 저희 아버지는 "여기는 왜 1번어뢰를 안 키우냐"고 하시더군요. ㅎㅎ



  이승훈 교수의 책은 민관 합동조사단이 내놓은 작년 9월 내놓은 최종보고서 이후까지의 논쟁까지 이어집니다. 이 교수의 신변을 위협했던 세력들, 그리고 이 교수를 지켜주려 했던 일본 대학의 배려, 그리고 국내 과학자들의 소극적 반응, 해외 과학자들이 이 교수에게 보낸 적극적 격려 등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권위에 꽤 약한 사람들입니다. 저명한 원로학자가(그것도 과학자가) 엑스선회절(XRD)과 에너지분광(EDS)실험으로 분석한 그래프를 들먹이며 설명하면, 저 사람이 전문가인가보다, 다 맞겠지, 하게 되어있는 겁니다. 황우석 사건으로 뭔가 배운 것 같지만, 여전히 우리는 과학이라는 권위에 무지했습니다.

  이럴 때 국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서 명확하게 한가지씩 풀어줬으면 참 좋았을 텐데, 이승훈 교수를 비롯한 해외 거주 학자들만 이 논쟁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마음 놓고 자기 주장을 할 수 없는 풍토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한달 남짓 후면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한지 1년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과학이 사회를 위해 해야 하는 의무, 그리고 한편으론 언론의 의무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군요. 여러분은 '무엇을' 읽어내셨습니까.

쏘댕기자 (트위터 @sowhat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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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이언스 톡톡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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