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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소백산천문대를 다녀왔다. 마침 보름날이었는데 날씨도 좋아서 오랜만에 만월을 만끽했다. 근처에 있는 영주와 단양의 도시 불빛이 있긴 했지만 국립공원 안에 있는 소백산천문대의 밤은 제법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보름달은 다른 별들을 그 빛 속에 침잠시키면서 노란 필터를 낀 조명처럼 빛났다. 달그림자도 선명했다. 보름달이 휘영청 뜬 날은 또 다른 낮처럼 느껴진다. 강렬한 태양빛 아래서 경험하던 갈망하는 밝음과는 달리 감추는 듯 드러나는 한밤중의 밝음은 보름달의 특권일 것이다.

어릴 때는 보름달 아래에서 내 몸의 달그림자로 이런저런 패턴을 만들어보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놀이를 하곤 했었다. 나는 이런 나의 달밤의 행위를 달 샤워라고 불렀다. 철이 좀 들어서는 보름달이 떠오르는 장면을 즐겨봤다. 작은 강을 바라보면서 나지막한 언덕 위에 위치해 있던 지인의 별장에서 만났던 보름달 생각이 난다. 떠오르는 보름달 빛이 흐르는 강물에 길게 뻗어서 비치면서 협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관은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그 별장이 있던 성주는 참외의 고장이다. 참외를 키우는 비닐하우스가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비닐하우스가 거울이 되어 보름달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밤하늘에는 하나의 달이 빛나고 있었지만 강물 위에도, 비닐하우스 위에도 온통 보름달 투성이였다. 문득 ‘월인천강지곡’이 떠올랐었다.

지구는 형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화성 크기의 천체와 큰 충돌을 하게 된다. 이 충돌 과정에서 지구의 일부가 부서져서 튕겨져 나갔다. 충돌한 천체도 파괴되었다. 그 파편들이 다시 중력적인 작용으로 뭉치면서 달이 되었다. 현재 과학자들이 가장 그럴듯한 달 형성 이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시나리오다. 달은 형성 단계부터 지구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다.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처음에는 지금보다 더 가까웠다. 지구의 자전 속도도 더 빨랐다. 달도 지금보다 훨씬 더 빨리 자전하고 있었다. 큰 충돌 이후 카오스 상태를 겪은 뒤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지구와 달은 서로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달은 지구에 조석력을 발휘해서 바다를 출렁거리게 만들었고 생명을 잉태시켰다.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서 각각의 자전 속도도 느려지게 되었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팔을 움츠리고 돌면 빨리 돌고 팔을 벌리면 회전하는 반경이 늘어나면서 회전 속도가 느려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가 작동한 것이었다. 질량이 더 큰 지구는 18시간 정도이던 자전 속도가 현재 24시간으로 느려졌지만 달은 자전 속도가 거의 한 달이 될 만큼 느려졌다. 공전 속도와 자전 속도가 같기 때문에 지구에서는 달의 한 면밖에 볼 수 없다.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지금도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격렬한 청년기 사랑의 시기를 잘 넘기고 이제는 서로로부터 조금은 거리를 두고 배려하는 부부의 모습 같다. 달이 없었다면 지금 같은 모습의 지구는 없었을 것이다. 생명이 결국 지구에서 태동했다고 하더라도 많이 지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글을 쓰는 나 같은 유인원의 탄생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앨버타의 인디언전투기념공원에서 한 신부가 보름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출처: AP연합뉴스)


달이나 지구나 스스로 빛을 만들어서 내뿜지는 못한다. 태양빛을 반사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나는 보름달이 가져다주는 아련한 밝음을 좋아하지만 초승달이 보여주는 아싸한 느낌도 사랑한다. 초승달을 자세히 보면 태양빛을 반사해서 밝게 보이는 부분 말고 마땅히 보이지 않아야 할 부분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승달 모양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히 달이 그 부분만 태양빛을 받아서 반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둥근달의 어두운 나머지 부분도 마치 그림자 느낌으로 그 윤곽을 드러내 보인다. 태양빛을 반사한 지구의 빛을 달이 다시 반사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달에서 지구의 반사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달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격렬한 어떤 사연을 공유한 사람.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사랑을 했던 그 사랑을 가슴속에 묻고 떠나갔던 여전히 그리운 사람. 끝없는 배려를 해주는 사람. 한쪽 면만 보여주지만 그것이 나를 위한 동조 과정의 결과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사람. 내 자신의 모습을 반사하듯 내게 보여주는 사람. 그러면서 늘 옆에 있는 사람. 하지만 멀리 떨어져서 지켜만 보는 사람. 보름달처럼 나를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어둠 속에서 환한 그림자를 만들어서 나를 춤추게 하는 사람. 천 개의 달이 되어서 온 세상에서 나를 기억하는 사람. 살다보면 달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늘 곁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달 같은 사람들이 새삼 고맙고 그립다. 보름달처럼 반달처럼 초승달처럼 그들의 얼굴과 마음이 스쳐지나간다. 그러다 문득 나는 누구의 달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누구의 달입니까?



이명현 | 과학저술가·천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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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이언스 톡톡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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