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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철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나는 먼저 2등성부터 4등성까지의 대표적인 다섯 개의 별이 균형 잡힌 오각형을 이루고 있는 세페우스자리부터 살펴본다. 몇 등성까지 보이는지를 보면 그날 밤하늘의 상태가 어떤지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서울 하늘에서 온전한 오각형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날은 그야말로 깊은 가을밤 하늘을 만끽할 수 있는 날이다. 내 눈에는 그 오각형이 예쁜 강아지 집으로 보이지만 표준 별자리에서는 에티오피아(또는 취향에 따라서 이디오피아) 왕인 세페우스가 그 주인공이다. 세페우스자리 바로 옆에는 아내인 카시오페이아가 있다. 또 그 옆으로 딸인 안드로메다와 사위인 페르세우스가 각각 별자리를 이루고 있다. 가을밤 하늘은 세페우스 가족의 향연장이라고 해도 좋겠다.

세페우스는 Cepheus로 표기한다. 이 글자를 ‘세페우스’라고 발음했다가 어느 교수에게 엄청나게 혼이 난 적이 있었다. 대학생 때의 일이다. 아마추어 천문가로 활동하면서도 세페우스라고 말하고 다녔고 또 그렇게 들었었다. 간혹 이 글자를 ‘케페우스’로 발음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는지는 말하는 사람의 국적과 습관에 따라서 다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학회에서 만났던 벨기에 출신 천문학자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꼭 상대방의 국적을 묻곤 했었다. 거기에 맞춰서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려는 그만의 유머였다. 네덜란드의 천문학자인 Huygens를 우리나라에서는 한동안 ‘호이겐스’라고 불렀었다. 요즘은 네덜란드 현지 발음에 가까운 ‘하위헌스’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당연히) 진짜 발음은 한글로 온전하게 적을 수가 없다. ‘g’ 발음을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은 상태에서 격하게 튀어나오는 ‘ㅎ’ 비슷한 발음으로 내뱉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교수는 ‘케페우스’에 꽂혀 있었던 것 같다. ‘세페우스’는 틀렸고 ‘케페우스’가 맞는다는 것이었다. 납득할 수 없어서 그 이유를 물었지만 막무가내였다. 한참 동안 무례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를 대표해서 별의별 훈계를 다 들어야만 했다. 나는 그 교수의 ‘케페우스’ 선창에 따라서 같이 있던 친구들과 함께 유치원 아이처럼 ‘(네, 네,) 케페우스’를 십수차례 복창까지 해야만 했다.

세페우스든 케페우스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것은 본질적으로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발음할 것인지에 대한 약속의 문제이고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행의 문제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강압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은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니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거의 모든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강요하는 집단들 사이의 ‘옳음’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세페우스나, 케페우스냐. 일단 그림은 '세페우스'라고 적혀 있긴 하다.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한 친구와 군산의 영문 표기를 놓고 격론을 벌인 적이 있다. 쟁점은 군산을 영어로 쓸 때 첫 글자가 K냐 G냐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브리태니커 사전을 갖고 있던 다른 친구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지식을 총동원해서 논쟁을 벌였었다. 누가 K를 주장하고 누가 G를 주장했는지는 사실 가물가물하다. 어디선가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대신 ‘K작전’으로 불렸던 군산상륙작전 계획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내가 K를 주장했을 개연성이 높기는 하다. 아버지 고향이 군산이었던 그 친구는 확신을 갖고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500원이라는 당시로서는 거금을 걸고 내기를 하기에 이르렀다.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결국 친구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결론이 났었다. K든 G든 간에. 나는 거금 500원을 그 친구에게 헌납해야만 했다. 처음부터 맞고 틀리고가 없는 논쟁이었다. 하지만 영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한글 단어의 영문 표기는 중요한 논쟁거리일 수 있었다. K와 G의 논쟁을 겪으면서 우리는 더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나중에 부질없는 내기를 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무렵부터 이 이야기는 만날 때마다 되새기는 추억이 되었다.

아직 한 가지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다. 그 친구는 나중에 500원을 나한테 돌려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받은 기억이 없다. 사건은 미궁에 빠져버렸다. 이 미해결 사건을 빌미로 나는 큰 회사의 최고경영자로 활동하고 있는 그 친구에게 만날 때마다 밥값이니 술값을 지불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어린 시절 투자한 500원을 핑계로 평생 얻어먹겠다는 심보다. 그 친구보다 내가 더 큰 장사꾼이다.


이명현 | 천문학자·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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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이언스 톡톡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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