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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애가 첫애일 수 있는 것은 둘째, 셋째처럼 다른 애들이 있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첫애는 외둥이가 되어버린다. 처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다음이 있어야 하는 게 사는 이치임에도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평가에서는 종종 이를 망각하는 제도가 설계되고 존속된다. 대표적인 것이 유사·중복연구 방지제도이다. 정부는 국가연구개발과제 수행 시 ‘국가연구개발사업관리 등에 관한 규정’ 제7조에 따라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시스템(NTIS)을 통한 과제 유사성 검토를 의무화하고 있다.

 

NTIS 구축사업 경제성 분석에 관한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유사·중복 과제 방지를 통해 2005~2012년까지 총 630억원을 투입해 약 5409억원 이상의 예산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2013년 감사원에서 2008년부터 5년간 국가 연구개발 사업을 추진단계별로 분석해 발표한 ‘국가 R&D 감사백서’에서는 기획단계에서 연구개발사업의 유사·중복성 차단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검토하고 있다. 이 백서에 따르면 2013년의 경우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연구개발 예산을 조정하면서 유사·중복 사업군에 대한 소관부처 이관, 통폐합으로 1038억원의 예산을 절감했으나 연구과제 단위로 살펴보면 타 부처와 중복된 과제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연구개발에서도 유사·중복성이 문제되는 이유는 한정된 자원을 낭비하기 때문이다. 최근 국가 연구개발 예산 증가율은 0%에 가까운데 오랫동안 연평균 10% 증가율을 경험하던 연구개발 수행주체에게 제로 증가율은 사실상 예산 감소로 체감된다. 이런 형편에서 연구개발 예산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반박하기 어렵다.

 

그런데 연구개발 분야에서 유독 유사·중복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은 효율성만이 아니라 혁신에 대한 집착에 기인한다. 노벨상도 그렇고 스마트폰도 그렇고 뭐든지 세계 최초로 해야 빛을 발하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 같은 걸 또 하는 것은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서 거북이가 토끼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아예 뒷걸음치는 꼴이니까.

 

우리말로 ‘혁신’의 뉘앙스는 그야말로 새로움으로 그득하지만 한자어 유래나 영어 표현은 새로움보다 오래됨이 느껴진다. 한자로 첫 글자는 가죽 ‘혁’으로 가죽의 근본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두번째 글자 ‘신’은 매울 ‘신’과 도끼 ‘근’이 합쳐진 것인데, 매울 ‘신’은 옛날 형별로 문신을 새길 때 먹물이 나오는 바늘이다. 그러니까 새로울 ‘신’은 도끼와 바늘로 가죽에 추가적인 문양이나 색깔을 넣어 새롭게 만든다는 뜻이다.

 

영어로도 이노베이션은 없는 걸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다르게 바꾼다는 의미이다. 해외에서 오래 재직한 모 대학 총장은 한국에 왔더니 혁신을 무슨 혁명처럼 여겨서 강연 때마다 일부러 이노베이션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한다. 독일의 과학사가 에른스트 페터 피셔는 힐베르트 호텔, 오컴의 면도날 등 과학의 아포리즘에 대한 대중 과학서적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하다. 그의 또 다른 대중서 <과학을 배반한 과학>에서는 열역학 제1법칙, 미적분 제1기본정리 등 과학의 법칙 숫자처럼 과학사에도 숫자 법칙이 있다고 한다. 그중 과학사 제0법칙은 아보가드로 상수, 핼리 혜성 등 과학자의 이름을 딴 정리나 발견은 그 과학자에서 처음 유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벨 과학상도 노벨의 유언에 따르면 원래 세계 최초의 과학적 성과에 주는 것이 아니다. 노벨의 유언은 “그전 해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을 가져온” 이들에게 수여하는 것이다. 대부분 노벨상 수상 업적이 되는 최초 연구와 수상 시점이 수십 년 차이가 나는 것은 그 연구가 의미 있는 최초임을 입증하는 데 그만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다시 유사·중복성 문제로 돌아가 보자. 2005~2012년 8년간 정부 연구개발비를 모두 더해보니 약 78조1000억원이 된다. 앞서 NTIS 경제성 보고서에서 추산한 유사·중복 과제 방지로 인한 약 5400억원의 예산 절감 효과는 동일기간 전체 연구개발비의 0.6%에 불과하다. 한편 e-나라지표에 가장 최근 데이터로 입력된 2014년 기준 상근 상당 연구개발 인력은 43만7000명이다.

 

수십만 명의 연구자들이 1%도 안되는 예산절감 효과를 위해서 매년 새로운 과제를 만들어내야거나, 장기적 연구를 위해 매년 새로운 포장을 해야 한다면 이야말로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새로움 자체는 가치가 아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수많은 과학기술 연구가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낳고 있지만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노벨의 말대로 인류에게 혜택을 가져다주는 ‘좋은’ 연구일 것이다.

 

김소영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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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이언스 톡톡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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