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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학교 앞에 다리 하나가 열렸다. 카이스트 정문에서 대전 시내에 곧바로 이어지는 다리로 융합의 다리, 과학의 다리 등 우여곡절 작명 과정 끝에 ‘카이스트교’로 개통됐다. 다리 중간에 과학자 기념 공간이 있는데 한 편에는 세계적인 과학자 넷, 다른 편에는 한국 과학자 셋의 흉상이 놓였다. 일부러 한국 과학자 흉상 자리를 하나 남겨 놓았는데 미래의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를 위해서란다. 포스텍에도 학생들이 많이 드나드는 무은재기념관 앞 광장에 아인슈타인, 에디슨, 뉴턴 등 과학자 흉상 옆에 미래의 한국 과학자를 위한 좌대가 놓여 있다.

 

이처럼 세계적인 과학자 반열에 드는 한국인 과학자 탄생에 대한 염원은, 입시교육 체제에서 무지막지하게 재미없이 가르치는 중·고등학교 수학·과학 수업, 실험실 연구보다 연구과제 관리와 정산으로 날밤을 새우는 연구 현장, 과학연구 지원을 빙자해 부실한 연구사업 기획을 눈감아주는 부처 관행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만약 정말로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는다면 어떤 소감을 피력할까? 소감의 일부로 노벨상 수상이 가문의 영광이자 일찍이 보릿고개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국가에 대한 보답이라는 코멘트가 들어가지 않을까. 오랫동안 정부 주도로 과학기술 연구개발을 추진해온 나라에서 과학 및 과학자에게 내면화된 국가주의는 꼭 한국인이 노벨상을 타야 하는지에 대한 반문을 우습게 만들어버린다. 물론 10월마다 되풀이되는 노벨상 타령이 작금의 연구 환경을 비판하는 담론으로 작용하는 긍정적인 측면은 있다.

 

15일 대전 유성구 구성동과 서구 만년동을 잇는 카이스트교 준공식이 열리고 있다. 이 다리명은 국가지명위원회가 결정해 국토지리정보원장이 고시한 사례로는 이례적으로 영어가 쓰였다. (출처: 연합뉴스)

 

1940년대 미국의 과학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과학자 사회를 특징짓는 가치 규범으로 보편주의, 공유주의, 불편부당성, 조직화된 회의주의 등 네 가지를 제시했다. 먼저 보편주의는 과학자의 업적은 국적, 계급, 인종 등 과학자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배경과는 별개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공유주의는 과학적 발견과 이론 등 과학 연구의 산물은 과학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과학자 사회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편부당성 혹은 이해관계의 초월은 과학자의 연구는 금전적 이득이나 명예 등 외부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으로 추동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직화된 회의주의는 과학자들이 어떤 주장이나 이론에 대해 과학적 증거와 방법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의심하고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조직화된 회의주의는 통계적 검증 절차에 잘 나타난다. 예컨대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수학을 잘한다는 주장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두 그룹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귀무가설’(null hypothesis)을 세운다. 일종의 허수아비인데 이걸 넘어뜨려야 차이가 없지 않다고 겨우 말할 수 있다. 만약 귀무가설을 남학생들이 더 잘한다고 세우더라도 그게 기각되면 두 가지 가능성이 생긴다. 하나는 두 그룹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 다른 하나는 여학생들이 더 잘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 검증은 ‘무엇이 맞는지 밝히는 것’(prove)이 아니라 ‘무엇이 틀렸는지를 밝히는 것’(disprove)이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머튼은 과학이 사회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봤으며, 과학 역시 사회적 제도로서 그 내부에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으로 과학자 사회의 규범 체계를 정리했지만 너무나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각각의 규범과 동떨어진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만약 상대성이론을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그만큼이나 천재적인 과학자였던 첫째 부인 밀레바 마리치가 발견했다면 과학사에서 마찬가지의 이론적 궤적을 그릴 수 있었을까? 과학이 국경을 초월한다지만 군비경쟁만큼이나 치열한 기술 확보 전쟁 뒤에는 국가적인 과학기술 시스템 경쟁이 있다.

 

그럼에도 머튼주의 규범을 새삼 되돌아보는 것은 과학에서 여전히 아나키즘이 가능한지 묻기 위해서다. 아나키즘은 어원 그대로 우두머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두머리는 곧 권력이다. 그 어떤 주장도 그 어떤 질서도 그 어떤 권위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그러니까 믿는 자가 아니라 의심하는 자에게 복이 있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결국 노벨상은 과학의 아나키스트들이 받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노벨상을 과학연구나 과학자 경력, 과학지원 정책의 최종 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것은 노벨상을 또 다른 권위로 만드는 일이다. 사실 그렇게 흘러온 지 오래다. 입시교육에서 국가연구개발사업까지 그 권위를 먹고 사는 시스템에서 과학의 아나키스트들은 어디 숨어 있는가.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 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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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이언스 톡톡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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